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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2025/07/10
차원문이 전국에서 열린 이래 괴이가 나타났고 성좌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초능력자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의 생활상은 이전과 비교해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여름은 여전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덥고,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놀랄 만큼 많다.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이나 만족감을 충족시키고, 때로는 더위로부터 피할 장소를 제공하거나 데이트 장소로 쓰이는 등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박물관이 하는 일은 차원문이 열리기 전이나 후나 다를 게 없었다. 이젠 삼국시대의 유물이나 발굴된 토기 등이 아니라 괴이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유물들이 주된 전시물이긴 하지만. 그 전시물 하나 하나가 다 힘겨운 사투 끝에 얻어낸 것들이고, 동시에 국가에 새로운 동력을 가져다 준 것들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별명이 붙을 정도로 피해를 끼치는 괴이들은 대개 4등급 이상이다. 방어막을 만들거나 불을 뿜는 등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는 게 당연한 수준이다. 3등급 이하라면 지금까지 개발된 괴이 대처용 무기로 군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지만, 그걸 넘어버리면 군을 동원하는 것은 효율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그럴 때 전장에 투입되는 것이 바로 투사들이다. 투사들은 성좌와 계약해 그 힘을 다루는 사람들을 말한다. 전면에서 싸우는 사람도 있고, 연구자나 의사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부여받은 힘으로 무엇을 할 지는 오로지 자기 선택이지만, 대부분은 명예나 인기, 전리품을 통한 막대한 수익을 얻기 위해 전장으로 향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런 투사들 중 한 명이었고, 어머니는 과학자였다. 소년이 갓 중학교에 들어서고 주위 세상에 대해 관심을 깊게 가질 때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전장 한복판에서 활약하며 텔레비전은 물론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유명했다. 유명한 것도 강한 것도 두 번 말하면 입 아플 정도였지만, 그만큼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적었다. 소년에게 있어 무엇이든 말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녀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소녀가 소년의 "누나"라고 말했다. 나이 차이는 세 살 정도였다. 어릴 적에 세 살 차이는 꽤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경우에 따라선 그것만으로 서로 으르렁댈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나이 차이를 신경쓰진 않았다. 둘은 거의 늘 사이가 좋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주 볼 수 없으니까 서로라도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달리 방법도 없었다. 아버지는 늘 괴이와 싸우면서 사람들을 지켜야 하고, 어머니는 국가에서 진행하는 비밀 연구에 몰두하느라 밤낮이 없으니까. 국가와 국민들을 위한 일이다. 두 사람 다 부모님이 집에 오기 싫어서 오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니 늘 괜찮았다. 그래도 빈 자리가 느껴질 때는 남매는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사투를 벌이며 수집한 전리품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고, 어머니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구들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남매에게 박물관은 부모님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했다. 나들이 가는 걸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창,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올해 7월 1일부터 7월 16일까지, 특별전시실 1에서 아시아 최초로 7+등급 괴이의 신체기관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들께서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현재 특별전시실 1에서는⋯⋯. 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특별전시실 쪽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와 본 사람이라도 어디가 특별전시실인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복도를 가로지르니 인파가 계속 한 방향으로만 쏠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앞으로 두어 발자국 내디디는 데 삼 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까치발을 들어 앞을 내다보니 앞으로 한 시간 넘게 계속 기다려야 할 만큼 줄이 길었다. 소년은 기다리기 싫어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다 안다는 듯 씩 웃었다. "동백 아저씨한테 들여보내달라고 하자!" "좋은 생각이야!" 박물관의 선임 도슨트 이동백은 남매의 어머니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남매의 사정을 헤아려 직원 통로로 종종 들여보내주곤 했다. 남매는 기나긴 줄에서 슬쩍 빠져나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동백은 하는 일이 일인지라, 휴식 시간에는 관람객을 가능하면 만나지 않을 수 있게끔 일반적 전시 경로로부터 먼 곳에서 쉴 수 있게 배려받곤 했다. 남매는 그걸 잘 알았다. 오늘도 냅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직원 통로를 열어달라고 떼쓸 참이었다.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하고 나쁘게 말하면 성가신 부탁이 되겠지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남매가 생각하기엔 그것만큼 좋은 아이디어는 달리 없었다. “오늘은 2층에 유난히 사람이 많네…….” 소년의 고개가 저절로 기울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도 많았고, 생전 처음 보는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허리에는 기묘하게 생긴 일자형 막대를 차기도 하고, 수직으로 구부러진 새까만 막대를 끼운 사람도 적게나마 볼 수 있었다. “돌아갈까?” 소녀가 물었다. 소년은 1층을 힐끔 내려다 보곤 고개를 저었다. 그새 사람이 더 늘었다. 동백을 통해 직원 구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전시물을 해 지기 전에 볼 방법은 없어 보였다. “빨리 아저씨한테 문이나 열어 달라고 하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2층은 언제나 인적이 드물고, 1층이나 3층에 비해 썰렁하다고 느껴질 만큼 한적한 기운이 강했다. 관람객들처럼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으니 어색하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 동안의 편안함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소년은 무심코 소녀의 손을 꽉 쥐었다. 자칫하면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때, 쾅 하며 무거운 소리가 났다. 소년은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소녀가 바닥에 밀려나며 넘어졌다. 앞을 보지 않고 휴대기기를 만지작거리던 남자와 부딪혔다. “아, 진짜! 뭐야? 꼬맹이들이 왜 여기서 어슬렁대?” 남자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곱게 다려진 검은 양복과는 달리 무척 기품 없어 보였다. “확, 저리 안 가? 뭣도 모르는 것들이.” 남자는 나머지 한 손에 막대를 들더니 소녀를 향해, 나아가 소년을 향해 들이밀었다. 남매는 막대의 정체는 알지 못했지만, 남자의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위협이었다. “아저씨가 먼저 부딪혔잖아요!” 소년의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소녀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에 담긴 짜증이 더욱 깊어졌다. “아, 열받게 하네. 안 꺼져? 주제도 모르고…….” 남자는 소녀를 향해 막대를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이 사이에 걸어오자 남자는 멈칫했다. 소년은 곧 고등학교에 입학을 앞둔 신분이긴 했어도 키도 컸고 근육도 잘 붙어 있었다. 양복을 입었든 막대를 들었든, 체격은 언제나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나한테 손 대지 마시지.” “이, 이 새끼들이 쌍으로!” 필요하다면 소년은 남자에게 달려들어서라도 소녀를 안전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복도 너머에서 남자를 향해 사나운 목소리가 대신 울렸기 때문이다. 남자의 가래 섞인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깨끗하고 위엄 담긴 목소리였다. “잘들 하는 짓이군, 재규어 요원. 내가 지금 본 바를 팀장에게 알려도 되겠나?” “구, 국장님!” “학생에게 하는 말이며 행동이며, 아주 가관이더군. 우리가 여기 학생들에게 으스대러 왔나, 아니면 혹시 일어날 지 모르는 보안 사고를 예방하러 왔나?” 남자는 겁에 질렸다. “대답 안 할 건가?” “보, 보안 사고 예방입니다!” “자네가 한 행동은?” “학생들에게 으스댄 일입니다!” 국장은 훨씬 더 나이가 많고 노련해 보이는 남자였다. 차가운 눈으로 재규어 요원을 바라보더니, 자기가 건너온 다리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팀장에게 가서 스스로 이야기하게. 국장이 자네 덕분에 심기가 좋지 않다고.” 더 이상 대들 기운도 없는지, 요원은 어깨를 떨며 다리 너머로 힘없이 걸어갔다. 얼굴까지 수척해 보일 지경이었다. “미안하구나.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하마. 다친 곳은 없니?” “없어요. 지금은 그렇게 기분도 안 나쁘고요.” 국장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2층에는 누군가를 만나러 올라온 거니? 오늘은 평소와 달리 사람들이 좀 많을 텐데, 다른 층의 유명한 전시를 봐도 괜찮지 않을까.” “아, 저희 동백 아저씨를 뵈러 왔어요. 늘 계시는 방에 있으실 것 같아서.” “음? 미안하지만 선임 도슨트는 지금 방에 없다. 아마 직원 구역에서 다른 전시품을 점검 중일 것 같은데.”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저희 것 특별전시실 입장권을 갖고 계시거든요.” 국장은 흠,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고민을 깊게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대답은 금방 나왔다. “회의도 끝났으니 문제 될 건 없겠지. 직원 구역은 여기 복도 끝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돼. 선임 도슨트는 아마 8번 방쯤에 있을 거다. 붉은색 삼각형 표지가 붙은 방에는 폭발하는 것들도 있으니 들어가지 말도록 하렴.” “네, 감사합니다.” 소녀는 기지개를 힘껏 켰다. 어디 아픈 곳이 정말 없어 보여서 소년도 마음을 놓았다. “아, 잠시만.” 다시 손을 잡고 걸어가려던 차였다. 국장의 목소리가 뒤에서 남매를 멈춰세웠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두 사람 모두.”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처음 만난 사람이 이름을 물어보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낯설었지만 알려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저는 정세경이고, 여기는 ■■■예요. 남매 사이고요.”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맙다. 혹시 직원 구역에서 누가 들여보냈냐고 물어보면 공공질서재정관리국 양형민 국장이 들여보냈다고 말하면 돼. 앞으로는 방금 같은 일은 없을 거다.” 그럼 이만, 하더니 국장은 손을 펄럭펄럭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움이 가득 묻어났다. 정신 차려보니 아까와 비교해 검은 양복이나 막대를 지닌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아무래도 국장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재규어 요원이 그렇게 호되게 데였고, ‘심기가 좋지 않다’고 했으니 특히나 그렇겠지. 누구나 덤터기 쓰며 잔소리 듣긴 싫은 법이다. “얼른 가자. 아저씨가 다른 방으로 옮겨 가기 전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요원? 국장? 공공질서? 관리국? 하나 같이 자주 듣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소년의 머리엔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아저씨에게서 빨리 티켓을 ‘뜯어내서’ 유일한 가족과 함께 전시물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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