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9: September
눈을 뜨니 설국이었다. 꿈 속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 책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실내인데도 바닥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는 것이 기이했다. 발을 한 번 내딛으면 새햐안 눈이 움푹 패였다. 습기 섞인 따뜻한 바람이 멀리서 불어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느껴지는 감각은 현실의 것과 아주 똑같았다.
한 움큼 잡아 확인해보니 눈은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꿈을 꾸는 건 낯선 일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꿈을 꾸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내 잠은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게 계속 유지되길 바랐다.
이제 와서 왜 갑자기 꿈을 꾸는 건지. 한참 생각하다가 문득 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젯 밤 잠들기 직전 스스로를 향해 심리 마법을 걸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문 마법’, 즉 과거의 기록을 꿈에서 들여다보는 마법이다. 유력한 용의자나 범인이 진술을 거부할 때 자백을 받아내려 사용하는 마법이다.
상대의 뇌를 헤집어 기억을 강제로 여는 마법이니 대상자의 건강에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만큼 자기 스스로 알지 못하는 기억까지 볼 수 있다는 의외의 장점이 있다. 지금 내겐 그 ‘의외의 장점’이 필요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내 기억은 대개 흐리고 모호하다. 어떤 부분은 검열된 것처럼 새까맣게 칠해져 있다. 기억해내려고 하면 두통이 온다. 그 누구라도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엔 동의할 것이다.
더욱 안 좋은 점은 이게 근본적으론 이게 내 기억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기억은 대개 내 소유가 아니다.
나는 환생자다. 평범하게 일과를 마치고 잠들었을 뿐인데 눈을 뜨니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낯설었고 당황스러웠지만 현실을 납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루 아침에 전 재산을 다 날릴 수도 있는 것이고, 내 가장 친한 친구가 하루 아침에 명을 달리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자고 일어났더니 실업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일들과 다를 게 없다.
환생이라기보단 빙의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 빙의했다는 사실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다. 당혹스럽긴 하지만 문제될 건 없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갖고 있던 기억 중 지워진 부분이 있다는 게 문제다.
기억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학술적 지식이나 얻었던 정보 등은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일이다보니 실감이 날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의 이력서를 내 것마냥 쓰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이 몸은 본래 다른 사람이 쓰던 것이다. 정세경이라는 이름도 내 이름이 아니다. 사실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난 심지어 빙의 전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기억해낼 수 없는 처지니까.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예전의 나 사이에 공통점은 딱 하나뿐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 이외엔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다. 답답한 상황이다. 답을 알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다.
도대체 어쩌다 빙의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세계의 난 어떤 상황인지도 알지 못한다.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는 당연히 모르며, 기억 여기저기가 크게 비어 있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곱씹고 있자면 순간적으로 약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내 머릿 속엔 정말로 방대한 양의 지식이 남겨져 있었다. 지식이 있다면 시도해 볼 방법은 많았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심문 마법을 걸어서 과거를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다.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제3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 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내 기억은 누가 지웠는지, 왜 지웠는지 같은 질문들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차피 하나의 근본적 질문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처음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내 머릿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지식이 들어 있었다.
처음 맞닥뜨린 초능력이나 마법을 어떻게 분석하고 연구하는지라던가, 충분한 정보가 쌓였다면 어떻게 무효화나 봉인을 통해 제압할 수 있는지 등 끝을 알 수도 없는 무서운 지식들이 내 안에 산과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정보들이 있을 정도다.
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작위적이다. 마치 기억을 편집한 것에 대한 보답 같다. 그래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이 혹시 누군가 의도한 일은 아닐까?
“왜 그렇게 심각해. 고민이라도 있어?”
고개를 흔들자 등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좋은 밤 보내고 있는 사람의 표정은 아닌 것 같네.”
이번에 맞이한 것은 또 새로운 방문객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머리 위에는 면사포를 연상시키는 베일.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하얀 우산을 펼친 채 손에 쥐고 있는 게 기묘하다.
그래도 놀라진 않았다. 확실히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최근 여러 경험을 통해 이렇게 사람을 만나는 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나는 전 직장 동료도 하나 있고, 내 현실에 제멋대로 들락날락대는 공주님도 하나 있다. 이 정도면 오히려 평범하다.
“별로 안 놀라네?”
내 표정에 큰 변화가 없으니 우산 쓴 여자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였다.
“내가 뭐하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은 이 몸의 집사잖아. 바라는 반응을 해주는 건 당연한 거라고.”
집사? 예상 밖의 단어였지만 의미를 헤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고양이구나.
“이번에도 안 놀라네. 자존심 상해.”
“미안하지만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건 당일부터 알고 있었어. 놀래키고 싶으면 좀 더 분발하도록.”
천연덕스레 답하자 여자는 분한 듯 두 주먹을 꽈악 움켜쥐며 날 올려다보았다. 반응이 재밌긴 했지만 더 놀리진 않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어? 이제 와서 자기소개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물어볼 게 좀 있었거든.”
눈이 마주쳤다. 페인트만큼이나 붉은 눈동자에선 복잡하게 얽힌 여러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경계든 위협이든 연민이든, 하나로 딱 잘라 말하기 힘들 만큼 묘한 눈빛이었다.
“있지, 잠시 좀 걸을까?”
여자는 무엇이 궁금한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그걸 따라 돌아보니 길게 회랑이 뻗어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 꿈에서 깨긴 하겠지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손짓을 따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나아갈 수록 여기저기 부수고 깬 흔적이 눈에 띄었다.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건 모조리 망치 등으로 때려부순 것 같았다. 꿈은 자신의 내면을 반영한다던 말이 불현듯 떠올라 기분이 그닥 좋지 않았다.
“지금껏 여러 사람의 꿈 속을 돌아다녀 봤는데 말야. 여기만큼 이상한 풍경을 본 적이 없어.”
중간에 멈춰 섰다. 복도 한 켠에 스테인드글라스가 걸려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산산조각나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로지 돌로 된 벽만이 굳건하게 선 채 이곳이 회랑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복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비슷한 처지였다. 아무래도 더 이상 감상평을 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사랑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실례잖아. 나도 내 꿈이 이런 느낌일 줄은 몰랐지만.”
“당연히 몰랐겠지. 어떤 생명체가 꿈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겠어.”
본능적으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치미 떼지 마. 이런 건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당신의 꿈결은 터무니없을 만큼 정교하고 면밀한 솜씨로 세공되어 있어. 이 몸도 나름 오래 살았는데 이런 건 한 번도 본 적 없다구.”
“구체적으로 말해 봐. 어떻게 다른데?”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무언가 알아선 안 되는 것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초조해졌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도 들었다.
“꿈의 구성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아마 인류도 심리학으로 잘 알고 있을 거야. 그 날 있었던 행동이나 감정뿐만이 아니라 카타르시스와 스트레스 같은 것도 포함돼. 일반적으로 꿈의 내용에 일관성도 논리도 없는 건 원래 생명 활동이라는 게 그 모양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 경우에는 어떤데?”
여자는 잠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분명히 보았다. 할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이 몸의 이름은 푸르푸르 프림이야. 그리고 그 이름에 대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당신의 꿈은 보통 생명이 꾸는 꿈과는 전혀 다른 거야. 만약 당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이렇게 된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거야. 머릿 속에 미니 우주를 달고 사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니까.”
잠깐, 미니 뭐?
“다시 말해 봐. 뭘 달고 산다고?”
“우주. 문자 그대로의 의미야. 당신의 몸은 지금 잠들어 있지만 우리가 있는 이 곳은 단순한 꿈이 아니야. 또 다른 현실이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왜 만들었는지, 애초에 이런 게 가능이나 했던 건지는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말고.”
이제 프림은 나를 걱정하는 눈빛을 숨기지도 않았다.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멋쩍어졌다.
“그런 이유로 보러 왔던 거야?”
“집사 건강 체크하는 것 말고 고양이가 할 일이 뭐 있다고. 어차피 걱정되니까 왔다고 해도 안 믿을 거였잖아."
“딱히 의심했던 건 아니야. 애초에 등장부터가 갑작스러웠다고. 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대화를 주도하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을까, 프림은 잠시 입을 삐죽대다 이내 적반하장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와 비교해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 커지지 않은 것이 그럭저럭 흥미로웠다.
“제대로 이름을 불러 줘! 아까 말했잖아, 이 몸에게는 푸르푸르 프림이라는 훌륭한 이름이 있어.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도망갈 악마들이 지하에 태산이라니까!”
“알았다, 알았어⋯⋯. 정세경이라고 해. 잘 부탁한다, 푸르푸르.”
나는 먼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프림은 여전히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긴 했지만 악수를 거절하진 않았다. 맞잡은 손은 차가웠지만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차갑지? 그만큼 이 몸이 마음이 따뜻해서 그래.”
그새 입가에 미소가 번진 모양이다. 의기양양한 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말 없이 작은 손을 꽉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살짝 아픈데 놔 주겠어? 아프다니까?”
나는 눈 앞에서 들려오는 항의를 상쾌하게 묵살하고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푸르푸르로부터 얻어맞은 어깨는 꿈에서 깬 뒤에도 여전히 얼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