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Get Lucky (2)
통학용 열차 안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오랜만에 보았는지 안부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많았고, 어색함 하나 없이 마주 앉아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열렬히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차나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바깥 풍경을 본다던가 다과를 즐기던가 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특히 맨 끝 객차만큼은 무척 조용했다.
세경은 그 분위기에 나름 만족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조용한 편이 좋았다.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집중할 만큼 여유도 있었다. 벌써부터 사교 활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객실 내에 비치되어 있던 신문을 읽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다른 승객들도 굳이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6인용 객실에 그를 포함해 다섯 명, 그를 제외한 승객은 총 네 명이었다.
성별로는 여자 세 명과 남자 한 명. 외모로는 서양인 세 명과 동양인 한 명. 관찰로는 여유로운 세 명과 초조한 한 명. 옷차림에서나 태도로나 모두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했다. 같은 객실 안에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었다.
같은 기관의 학생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어떤 학생들을 맡게 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들은 바 없었다.
내부 구조도 익혀야 하고, 과목이나 학생들에 대해서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도착한 첫 날이라고 여유가 충분하진 않을 것 같았다.
세경은 신문에 집중하려 했지만 이미 다 아는 이야기들 투성이였다.
그는 짧게 숨을 뱉고 들고 있던 걸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당신께서는 학생이 아니시죠?”
그 때 옆에 있던 청년이 대뜸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옆에 앉아 있던 금발의 남자였다. 후드가 달린 스포츠웨어에 짙은 노란색의 반바지, 그리고 검은색과 주황색으로 멋을 낸 운동화까지. 공원을 달리다 벤치에 앉아 쉬는 중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흠, 어떻게 알았지?”
“음, 겉으로 티가 났다기보다는⋯⋯ 그 신문, 사실 학생들은 안 읽으니까요. 무척이나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아까까지는 다리를 꼬고 있었는데, 어느 새 푼 모양이었다.
남자는 세경을 향해 앞으로 쭉 내밀었다. 햇빛을 받아 옅은 갈색으로 탄 피부색과 달리, 몸짓에는 충분한 기품이 담겨 있었다.
“필립 에반스입니다. 전공은 기사, 동아리는 펜싱이지요.”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정세경이라고 한다. 좀 전에 예상했다시피 이번에 새로 부임하는 교수야. 어쩌다 보니 이리 오게 됐지.”
필립에 이어 세경도 스스로를 소개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동양인 소녀가 고개를 휙 치켜올렸다.
“앗, 한국 분이세요?”
처음 말은 한국어였지만, 헛기침 후에는 영어로 고쳐 말했다.
“신예은이라고 합니다, 교수님. 올해 입학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세경은 예은과도 짧게 악수를 나누었다.
“한국어로 말하셔도 상관 없는데요, 두 분.”
필립의 한국어 발음은 놀라울 만큼 유창했다.
“한국어 되게 잘 하시네요, 에반스 씨!”
그러자 뒤에 있던 붉은 머리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말하는 동안에도 나른히 턱을 괸 채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영어 잘 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많은데. 별 다를 것도 없어.”
“자기소개 안 한 사람은 대화 참여 사절인데.”
필립이 그녀를 대하는 말투는 아까와 전혀 달랐다.차갑고 날카로웠다.
악의나 적개심이라고까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경계심이라곤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서로 신뢰를 주고받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베라 에니아드 메스메르. 다 부르기엔 길지만 베라로 줄여 부르면 그만이야.”
대답하는 베라의 태도는 여전히 무심하고 나른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바라보면 어디까지나 필립의 일방적인 경계였다. 베라는 그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경계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신경 자체를 쓰고 있지 않다. 같은 객실 안의 승객이니 어느 정도는 의식할 법 한데도, 베라의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건조했다.
“확실히 길긴 하네.”
베라는 고개를 돌려 세경을 바라보았다.
대답 중 뭐가 만족스러웠는지 한쪽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다.
“물론이지. 다른 두 부분은 서류 안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야. 격식 같은 걸 붙여 부를 필요 없어, ‘교수님’.”
역시 새로 붙은 호칭은 어색하기만 했다.
“그 외에 알아둬야 할 것은?”
베라는 아무 말 없이 고ㅁ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창문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에 휘날렸지만, 그녀는 나부끼는 걸 머리끈이나 핀으로 정리할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없어. 교내에서 날 볼 일은 잘 없을 테니까.”
“학생을 교내에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교직원과 사이가 안 좋은 학생들의 특징이잖아. 난 심각하게 안 좋은 편이라⋯⋯. 나중에 도착하면 한 번 물어봐. 긴 이야기를 들려 줄 거야.”
“직접 들려줄 생각은 없어?”
베라는 혀를 찼다. 그러더니 신경쓰는 기색 하나 없이 다리를 꼬았다.
“부끄럽잖아, 숙녀에게 실례야.”
삐딱하게 보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수준을 넘어 당연하게까지 느끼는 듯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도발이라도 하듯 히죽 웃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카로스의 교수진들의 권위를 중시한다면 평가를 낮게 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닐 테다.
세경으로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삼사백 년쯤 산 마법사 앞에서 다리를 꼬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축제 기간이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걸요, 교수님.”
누군가 새롭게 대화에 참여했다. 베라의 옆에 앉아 있던 또래의 여자였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 붉은 가죽 외투와 검은 치마. 사색의 깊이가 느껴지는 진한 파란색의 눈동자.
“아니에스⋯⋯ 이름, 아니에스 팰즈버러라고 합니다. 수습 담당이예요, 베라의.”
“수습이라고 하면 오해하잖아. 교수진이 날 골칫거리로 보고 있을 뿐이야. ‘난투’ 참여 기회도 착실히 반납했는데 말이지.”
대화는 학생들만 이해할 수 있는 흐름으로 빠져들었다.
세경이 옆에서 고개를 기울이자 예은이 슬쩍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카로스에는 신입생이 입학할 때마다 축제를 개최하는 전통이 있다. 신입생들에게는 학교를 체험하게 하고, 재학생들에게는 분위기를 환기시킬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축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난투’다.
교수 임용 후 가장 먼저 만나게 될 중요 행사 중 하나인 모양이다.
축제라는 단어가 가지는 즐거운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학년이나 전공 등의 구분 없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의 목표를 위해 대놓고 싸우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자신의 실력이 전체 기준에서 얼마나 되는지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개중 뛰어난 일부는 신입생 시절부터 장학금이나 조합의 지원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야망이나 꿈 있는 사람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일 것이다.
물론, 학교 측에 밉보이면 출전 기회도 없기 마련이다.
“정말로 원해서 반납한 거였으면 나, 이렇게 말 안 해.” 아니에스는 담담히 말했다.
의아하다는 표정의 베라와 미묘한 웃음의 아니에스는 서로 상반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베라가 불같은 성격과 뒤돌아보지 않는 올곧음을 통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한다면, 아니에스는 온화한 성격 속에 숨은 확고한 결단력과 장난기를 통해 깊은 인상을 새기는 쪽이었다. 사뭇 상반되지만 둘은 꽤 죽이 잘 맞아 보였다.
“마냥 결백하기만 한 건 아녜요, 우리. 지금껏 교수들이나 학교 귀빈들로부터 오는 명령을 내키는 대로 묵살했거든요, 베라는. 인류를 위해 싸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기관이잖아요? 어떤 의미로는 항명. 대놓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상할 건 없어요.”
“그렇다면 꽤 많은 불이익을 받고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걸지도 모르겠어.”
두 사람 다 확답하진 않았지만, 세경은 어느 정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대놓고 불성실함을 보이는데도 아직까지 남아있기 위해선 반드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교수진으로부터 직접적 요청이나 지시가 내려왔는데 그걸 정면에서 맞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력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직전에 아니에스가 말했다시피 이카로스 기관은 인류의 최전선에서 괴이와 맞서 싸울 사람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이곳의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라면 바로 힘이 아닐까.
그들 역시 ‘힘’을 근거로 퇴학을 피하고 있는 것일 테다. 피하고 있다기보단 학교에서 어지간하면 퇴학 처분을 하기 어려울 뿐이겠지만.
“우리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걸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교수진 그룹도 있고, 학교 내부 행사에 초대는 커녕 통보도 받지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지만⋯⋯. 그게 다야.”
“그 외의 불이익까진 받지 않는다는 뜻인가?”
“기관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력우선주의적인 곳이야. 충분한 힘이 있다면 압력에 대항할 수 있지. 권위는 대개 실력에 비례하지만 언제나 그러리라는 법도 없어.”
필립이 침묵을 깨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마 교직원들도 이렇게 오래 지시를 거부하는 학생들이 나타날 줄은 몰랐을 겁니다. 교무부에서 저 두 사람만을 노리고 새 징계 규칙 제정을 건의하고 있다는 말이 학기에 수십 번은 나돌아요. 아직까지 실제로 규정이 추가되진 않았지만.”
객차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의 반응은 서로 다 달랐다.
예은은 생각보다 강한 교수진의 힘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베라는 성가시다는 듯 혀를 짧게 찼고, 아니에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세경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 가지 떠오른 의문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해 최전선에서 싸울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목적에 이의는 없다. 최전선에서 싸워야 할 사람에겐 힘도 있어야 한다. 학생들 개인을 위해서도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상명하복이라니. 대체 왜? 역시 미심쩍었다.
“그렇네요. 실제로 생겨도 놀랍지 않죠.”
“인류 전체를 위해 싸울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곳이 이런 태도라니. 정 아니꼽다면 퇴학시키겠다고 말만 하지 말고 제대로 통보를 하던가.”
아니에스와 베라의 대답에는 같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객차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은 갑자기 베라가 천장을 향해 고개를 홱 치켜들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왜 그래, 베라?”
“열차가 멈췄어. 좋은 일 같진 않은데.”
세경은 눈을 감고 주위에 집중해 보았다. 확실히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객차 밖의 말소리나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다였다. 엔진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멈춘 건 분명했다.
수많은 승객들이 여전히 밖에서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차는 그들을 태운 채 아공간 도로 위에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전등이 두어 번 반짝이더니 이내 꺼져 버렸다. 동시에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빛을 잃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좀 더 기다리자 예비용 불빛이 들어왔지만 희미할 뿐 아까처럼 환하게 안을 밝히진 못했다.
“정전인가?”
세경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명장도 받기 전부터 해야 할 일이 생긴 듯했다.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반가운 구석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러블에 끼어드는 데 거침이 없네요, 교수님?”
“난 호기심이 많아서 말야. 흥미가 생긴다면 안 끼어드는 일이 없어.”
베라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기다리는 게 질린 건 세경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같이 가도 돼, 교수님? 첫 날부터 학생들과 협업하는 것도 나쁠 것 없잖아, 그치?”
성격 상 혼자 움직이는 게 편했다. 바쁜 비버의 호칭을 내려놓은 이래 거의 줄곧 혼자 행동해 왔다.
하지만 굳이 여기서도 혼자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베라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거절한다고 해서 그대로 앉아 있지 않을 거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바로 몇 분 전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부심을 표한 바 있다. 그 점에 대해서도 확인해 두어야 했다.
세경은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멋대로 해. 나도 멋대로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