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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 Get Lucky (1)

2025/08/06 업로드

서울역 2층 구석에는 크레페 매장이 하나 있다.

개업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작은 매장이다. 주문은 로봇이 받고, 주방 안에 조리 담당 한 명만 있을 뿐이다.

찾는 사람도 그닥 많지 않다. 맛은 출중해서 가끔 유명한 기자나 평론가의 호평을 받아 사람들이 늘어나긴 하지만, 결국은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이다.

1층에 있는 접근성 좋은 매장들이나 2층 중앙의 화려하고 주목을 끄는 매장들에 비하면 단출하고 소박하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손님을 받는 것보단 조금 적어도 충분하게 받는 게 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팜 양은 주방에서 크레페를 말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의 손님이 한 명 있었다.

구겨짐 하나 없이 잘 관리된 청록색 제복으로 몸을 치장한 여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머리에는 황금빛으로 사자를 수놓은 군모를 비스듬히 얹은 채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가판대 앞을 떠나질 않는다.

옷깃에 부착된 통역기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모양이다. 금발의 여성은 난감한 기색으로 손짓발짓을 되풀이했지만 로봇에게 그걸 감안해 줄 융통성이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 팜 양이 나가서 거들지 않아도 그녀는 원하는 메뉴를 잘 주문할 수 있었다.

도움의 손길이 있었으니까.

“크레페 두 개. 하나는 딸기 대신 블루베리로. 음료수는 제외.”

홀연히 나타난 남자가 자연스럽게 대신 주문을 넣었다.

검은 더플백을 손에 쥐고, 낡은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 키가 무척 컸다. 팜 양과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먼저 인사했다. 그녀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팜 양은 몰랐지만(모르는 게 당연하고), 그 사람은 바로 이카로스 기관의 신임 교수로 위촉받아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던 정세경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는군, 전우! 잘 지냈나?”

금발의 여성이 즐거움 가득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주먹을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세경의 맨손과 옥타비아의 군용 가죽장갑이 경쾌하게 닿았다 떨어졌다. 친근한 태도가 말해주듯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옥타비아 가로파노 경.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대리인이자, 올림포스(즉, 그리스-이탈리아 동맹)에서 몇 안 되는 외부 활동 요원. 세경에게는 여러 전투를 함께 치른 전우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괴이가 점령한 도시들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최전선에서 함께 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람은 잊고 싶어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잊고 싶지 않을 만큼 값진 인연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는 법이다.

“반가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만날 줄은 예상 못 했어.”

두 사람 사이의 막힘없는 의사소통은 순수히 영어로 이루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지만 세경은 다른 언어를 머릿 속으로 떠올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가판대 점원은 정성스레 포장된 크레페를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세경은 옥타비아가 장갑을 벗는 동안 두 개를 다 들고 있었다. 벗고 난 뒤엔 자연스레 그녀 몫을 넘겨주었고 그녀는 받자마자 덥석 한 입 베어 물었다.

금세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얌전히 우물거리는 모습과 제복 차림은 그닥 어울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볼 만한 광경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의장께서 자네의 안부를 물으시더군.”

옥타비아가 아르테미스를 대리하듯 다른 신들을 대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이 바로 의장 어거스타다.

의회에서 가장 알려진 것이 없는 사람이면서, 가장 매서운 힘을 휘두르는 사람이다. 동시에 그리스 전체를 이차원에 숨기는 마법을 24시간, 나아가 365일 내내 발동하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세경도 그 이상은 모른다. 기껏해야 사무적으로 몇 마디 나눈 적이 있을 뿐이니까.

“내가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고도 전해 줘.”

“물론이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최고 기술관의 말이잖나. 우리 모두가 산토리니 탈환전 당시의 자네가 보여준 용맹함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돌아가거든 필히 잊지 않고 전해두지.”

쓴웃음을 가릴 수 없었다. ‘최고 기술관’이라는 것은 전투 당시에 얻은 호칭이었다. 큰 영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세경에겐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지나친 칭찬처럼 느껴졌다.

멋쩍어졌는지 그는 고개를 짧게 양옆으로 내저었다.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여기엔 무슨 일이지?”

“집정관의 명을 받들어 왔네. 이카로스에 인재를 파견하는 날이거든. 절차나 내용 상 문제가 없도록 확실히 하는 것이 내 임무야.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 없지만⋯⋯ 이런 느낌의 일은 어디서 어떤 문제가 일어날 지 모르는 게 성가시군."

“익숙하지도 않겠지. 올림포스에서 문을 개방하는 건 201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들었어.”

옥타비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역 운행본부에서 알려드립니다. 열두시 정각에 출발하는 이카로스 기관행 열차는 예정된 시각에서 변동 없이 출발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제 때 탑승할 수 있도록 미리 수속을⋯⋯.”

이카로스 기관으로 가는 열차는 자정부터 시작해 여섯 시간에 한 번, 하루에 총 네 번 운행한다.

옥타비아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 고정된 시계를 확인했다. 잠시 후면 열한 시 반이 될 것이다. 열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잠시 걸을까? 십여 분이면 돼. 자네의 일정에 어떤 문제도 없을 거야.”

“친구의 부탁을 내가 어떻게 거절하지?”

세경 손의 두플백 지퍼가 알아서 내려가더니, 안에서 고양이가 슬쩍 머리를 내밀었다. 고양이는 옥타비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혀를 쭉 내밀고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메롱하는 고양이는 처음 본 모양이다. 녹색 눈동자가 순간 초점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헛기침 소리가 이번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성좌들은 더 이상 그들의 통치를 거부하는 인간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의원들 중 일부는 이제 그들이 인류를 통제 하에 넣고 싶어한다고 생각해.”

막힘없던 세경의 발걸음이 잠깐 멈추었다. 흘려 넘기기엔 의미가 제법 무거운 말이었다. 세경의 뇌리에 지난 몇 달 간의 음울한 소식들이 빠르게 스쳐 지났다.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

“캔자스를 비롯한 미국 대평원 지역에 괴이가 나타났지만 천사들은 일주일 넘게 돕지 않았지. 신경도 안 썼어. 헌신이 부족했다던가, 순종하지 않았다던가 등의 이유만 댔을 뿐이야.”

“그것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지. 성좌는 늘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받고자 하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의견은 아니야.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괴이는 여전히 전세계에서 다발하지만 성좌는 더 이상 적극적으로 인류를 보호하지 않아⋯⋯. 인류가 그들 스스로 보기에 적당한 조공을 바쳤을 때만 움직일 뿐이야.”

성좌의 태도를 지적한 것이 옥타비아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의견은 지금껏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신성모독’이라던가 ‘배은망덕하다’ 등의 비난을 받고 묻혔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학교의 역사 교과서들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의 사료들은 성좌들의 개입이 꽤 빈번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받을 때는 식량 생산을 도왔고, 지진이나 홍수로 터전이 파괴된 사람들을 위해 하룻밤만에 도시 전체를 수리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심지어는 성좌에 의해 강제로 매듭지어진 전쟁도 여럿 있다.

그것에 비하면 최근의 성좌들이 보이는 태도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준다. 적대적이라곤 할 수 없지만, 호의적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모호하다.

“어거스타는 그에 동의하나?”

“선택을 보류하셨다고 말하는 게 맞겠군.”

쓴웃음. 세경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동의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의견이다. 의장이 가진 권위와 무게를 생각한다면 그런 태도가 적절해 보였다.

“사실이든 아니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좌들이 인류를 구하기 위해 더 높은 세상에서 내려온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니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지. 사실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 성좌가 있기에 수많은 분쟁과 혐오의 뿌리를 제거했으니까. 하지만 최근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아. 애초에 왜 공간을 접는 열차를 만들어야 했겠나? 비행기를 쓸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해졌기 때문이잖나.”

“그렇지, 한국도 위아래로 괴이가 하나씩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걸 만들려고 애쓰지조차 않았을 거야.”

인천에서 출발해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경로는 이제 배에게도 비행기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한국 부산이나 일본 오키나와 아래부터 필리핀 동쪽까지의 영해는 이제 어떤 특정 국가의 점유 하에 놓여 있지 않다.

7+등급 괴이 리바이어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괌 쪽이 아니라 도쿄, 나아가 삿포로 즈음을 경유해 빙 둘러 가는 방법을 고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바이어선은 상상 이상으로 철저하고 예민하다. 지금껏 그런 식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 시도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지 않다.

결국 계속 불행한 사고가 거듭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동아시아 3국은 손을 잡고 해당 항로를 봉쇄했다. 해역 전체의 출입을 철저히 차단한 후에야 비극적인 사고의 연속을 끊을 수 있었다.

“자네도 알잖아. 성좌는 신이 아니야. 그들에게도 행동의 이유나 목적은 존재해. 심지어 희로애락도 존재하지. 그들이 인류를 돕는 이유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야.”

“그렇다곤 해도, 뭐하러 성좌들이 지금까지의 추세를 바꾸겠어? 자기네들의 통치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맡긴다 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는 그랬지. 사람들은 대개 누군가 이끌어주는 걸 좋아하니까.”

옥타비아의 손목 시계에서 삑, 삑하고 단조로운 음이 울렸다. 11시 48분이었다.

“실례, 자네의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은 모양이군.”

“천만의 말씀. 옥타비아 가로파노 경과 나누는 대화가 유익하지 않을 리 없지.”

입가에 빙그레 미소지었다.

도저히 미소의 의미를 종잡을 수 없었다.

“못 본 사이에 말재주가 많이 늘었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생겼나?”

“설마. 난 누군가와 연애관계를 함께 할 만큼 좋은 사람이 아냐.”

세경으로선 나름 진지하게 대답한 것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옥타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어넘길 뿐이었다.

“자네 나라의 속담에는 아주 인상깊은 것이 하나 있더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였나?”

“근거 없는 의심이야.”

“후후,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리 눈동자를 바라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세경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대체 옥타비아는 왜 웃었는지, 그 속담은 왜 인용한 것인지⋯⋯. 결국 그는 해석하려는 노력을 관두고 말았다.

지식의 깊이는 학자와 견줄 수 있을 만큼 깊을 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힘겹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자네는 교수로 간다고 들었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하겠지만, 어디서든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해. 특히 학생들을 잘 챙겨주고.”

“다른 곳도 아니고 이카로스로 가는 거라면 일신 상의 위협은 없다고 봐도 괜찮지 않나?”

“이카로스 기관 자체가 외부로부터 공격받는 일은 잘 없겠지. 하지만 기관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별개의 문제야.”

곱씹을수록 옥타비아의 분석에는 일리가 있었다.

이카로스 기관은 외부인의 출입을 허가하는 때가 일년에 다 합쳐서 한 달 반을 조금 넘는 정도다. 방어막 때문에 그 외의 날엔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

방어막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다. 외부의 습격은 분명 효과적으로 막겠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로 내부의 위협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질 가능성도 있다.

교수로서 그의 책임은 그런 일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학생들을 책임지는 것이 된다.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껏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람을 초점에 맞추고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쉽사리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지금껏 한 번도 겁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현재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FAFT는 열두 시 정각에 예정대로 출발합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없게끔 소지하고 계신 티켓을 한 번 확인해 주시고⋯⋯.”

정오에 출발하는 열차는 서울역에서부터 과거 웨이크 섬 지역까지를 약 네 시간 동안 내달린다. 당연히 비행기로 가는 게 더 빠르고 쾌적하지만 그건 리바이어선 때문에 불가능하다.

대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이 수 년간 매달린 끝에 만들어낸 것이 ‘고정궤도형 공간무시견인열차’, 통칭 FAFT라고 불리는 열차다.

이름이 복잡하긴 해도 동작 원리는 간결하다.

첫번째,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중계를 건설한다.

두번째, 출발지와 목적지에 건설된 중계기를 연결한다.

세번째, 두 중계기를 연결하면서 만들어진 아공간 도로를 통해 물리적 거리나 조건을 무시하고 열차를 발사한다.

여러 단어가 있지만 역시 ‘발사한다’는 표정이 정확하다. 목적지에서 출발지의 열차를 끌어당겨서 잡아당기기 때문에 그렇게 초고속으로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니까.

설령 목적지의 중계기와 직접 연결할 수 없더라도 크게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태평양 여기저기에는 큼지막히 얼어붙은 바다가 여럿 존재한다. 초자연적 힘으로 얼어붙은 것이라 녹일 수 없고 비행기 활주로도 건설할 수 없다.

일반적으론 어디에도 활용할 수 없는 땅이지만, FAFT 목적의 예비 중계기를 건설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문제될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꼭 서울역에서만 이카로스로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비행로를 사용해 진입하는 정부기관들이 드물지 않다. 그저 학생들이 서울역 기차를 타고 가는 게 관례처럼 굳어졌을 뿐이다.

특히 지금처럼 새 학기를 시작할 때쯤의 학생들에겐 거의 의무나 다름없다. 학생으로 입장하는 게 아닌 세경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은 아니지만, 그는 이런 체험에 꽤 흥미가 있었다.

“잠시 후 3번 승강장에서 이카로스 기관행 FAFT가 출발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승차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3번 승강장에서⋯⋯.”

슬슬 떠날 시간이었다. 세경은 차분히, 말 없이 옥타비아를 향해 목례했다. 남은 말은 다음 만남을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옥타비아도 똑같이 목례했다.

반나절 후면 사는 곳이 바뀔 예정이다. 세경은 곱씹다가 쓰게 웃었다. 이렇게 뜬금없는 변화는 무척 오랜만이었다. 승강장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발걸음이 사뭇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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