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 Eye of the Tiger (2)
세경의 건조한 갈색 눈동자가 주위를 훑었다.
움직이는 것은 본인과 몇 미터 너머의 여자 둘 뿐이었다. 품에 안은 고양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덩어리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타오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뜨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여전히 뜨거운지 확인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수확은 없을 거야. 이 상태에선 나 말고 달리 상호작용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을 테니까.”
“상호작용이라니⋯⋯. 시간을 멈춘 게 아닌 건가?”
“기대를 배신했다면 미안하지만, 나에겐 시간을 느리게 할 능력도 멈출 능력도 없어. 지난 십 년 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노화를 막진 못했으니까.”
충분히 맞는 말이다. 세경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히 고양이를 아래에 내려놓았다.
안정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나중에 시간의 영향을 다시 받더라도 넘어지거나 균형을 잃는 일이 없도록.
“내가 방금 한 건 바깥 시간의 흐름에서 격리된 임시 공간을 만든 거야. 당신들 기준으론 결계라고 하던가? 원래라면 당신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이지만, 당신은 십 년 간 나를 가장 가까이 두면서도 내 목소리를 들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까.”
결계에 그런 기능도 추가할 수 있었나?
그것도 꽤 굉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자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 말을 걸어올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어.”
“그거면 됐어. 이걸 가지고 오래 물고 늘어질 것도 아니니까.”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몇 초 전까지 서늘했던 표정은 이제 온데간데 없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알기 어려웠지만, 지금 보니 웃는 모습도 만만치 않게 아름다웠다.
물어봐야 할 것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차분히 하나씩 하기로 했다.
“일단 이름부터 듣자. 내가 널 뭐라고 부르면 돼?”
“이름이라. 음, 지금은 달리 떠오르는 게 없어. 지금은 ‘공주’면 되겠는걸.”
예상 범위 안에 눈곱만큼도 들어오지 않는 대답이었다.
적당한 반응을 생각해내는 데 평소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모양이지?”
다른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긴 했지만, 세경에겐 충분히 신경쓰이는 대목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 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해. 지금은 그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어.”
“적어도 스스로 ‘공주’라고 불리는 데 꺼리낌은 없는 모양이군⋯⋯.”
공주가 다시금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매섭게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호칭 관련해 말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그랬던 모양이야. 불만 있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공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어리둥절한 지 가만히 눈을 끔벅였다.
스스로를 공주라 칭한 것은 다름아닌 본인이건만, 이토록 태연히 맞장구치리라곤 또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놀라움을 느끼는 건 한 명만의 일은 아니었다.
세경으로서도 그 정도의 순진한 표정을 보게 될 거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첫인상에서 받은 느낌과 결이 다른 반응을 계속 보이고 있었다. 도저히 한 마디로 딱 정의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래도 초능력과 소통하는 건 처음이야. 누구나 이런 일을 한 번쯤 겪는 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건지 알 것 겉네. 초능력이라니 천만의 말씀이야. 나를 같은 카테고리로 묶지 말아주었으면 해.”
예상을 저만치 빗겨가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세경의 고개가 의아함에 옆으로 기울었다.
“같은 카테고리가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이지?”
“정말이지, 십년 간 날 이용해 싸우면서 뭘 느꼈던 거야. 당신이 ‘초능력’이라고 이름붙인 것들과 내가 같은 선상에 놓일 리 없잖아.”
확실히 그는 다른 사람들의 초능력으로부터 공격받은 적이 극히 드물었다. 지난 번에 여섯 명에게 덤볐을 때도 그들의 초능력은 그의 피부 하나 그을리지 못했다.
“초능력뿐만이 아니지. 당신이 신체 전반에 상시 두르고 있는 역장은 물리적 공격에도 무리없이 작동해. 심지어 당신이 모르고 있을 때도 작동하지. 감사 인사는 됐어.”
“이 능력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거지?”
“초능력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고 했잖아. 명심해야 할 원리나 규칙 같은 건 없어. 당신이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낼 뿐이야.”
공주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어쩐지 대충 설명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다야?”
“물론 뭐든지 당신이 상상한 대로 만들 수는 없어. 아무 준비 없이 만들 수 있는 건 자연물이나 단순한 구조의 무기물 정도야.”
“방어막 같은 것도 포함인가?”
“그렇지, 구조가 단순하니까.”
어느 새 공주의 손 위에는 축구공 정도 크기의 구체가 들려 있었다.
손을 아래로 내리면 구체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겉으로 보기엔 축구공과 비슷한 점은 크기뿐이었지만, 바닥에 부딪힌 구체는 탄력이 있는지 위로 튀어올랐다.
실제 축구공이라도 그 정도 높이로 튀어오를 것 같았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아. 하지만 복잡한 걸 만들고 싶다면, 당신이 구체적으로 구조와 원리를 상상할 수 있거나, 이미 스스로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이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찰흙으로 엉성하게 흉내만 낸 느낌의 결과물을 보게 될 걸.”
예시를 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난 이런 게 가능하다곤 들어본 적이 없는데.?”
“스스로의 한계를 전혀 모르는구나. 뭐어, 당신 잘못은 없지⋯⋯. 지금은 저기 있는 괴이를 해치우는 데 집중하자. 훈련으로는 충분할 거야.”
“훈련이라니?”
“당신들 기준에서 높은 등급을 매길 만한 힘은 없지만, 그래도 괴이는 괴이야. 지나치게 방심하다가 격 낮은 상대에게 애먹는 일이 없게 해 줘.”
공주는 사실 괴이를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바로 그 점이 이상했다.
세경에게 괴이 대응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때는 다섯 명 이상의 조직으로 움직였고 각자 보호구를 착실히 갖추고 있었다. 아무리 낮은 등급의 괴이라도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 아는 거야?”
“직감일 뿐이야. 더 높은 등급이라도 나와 만난 시점에서 당신의 승리는 기정사실이지만.”
무언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경은 정확히 무엇이 말이 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밀려든 정보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상황이 마무리되는 대로 어떻게든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주는 자신감 있게 입가에 미소를 밀어올렸다.
“당신은 보기보다 흥미로운 인간이구나. 축하해 줄게, 제대로 잭팟 친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섬광이 짧게 반짝였다.
공주는 그 찰나에 모습을 감추었다. 펼쳐져 있던 결계는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불덩어리에 다시금 열기와 속도가 붙기 시작했을 때 세경은 이미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공주의 말대로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았다.
주먹을 쥐는 동작 하나면 주위에 방어막을 펼치기에 충분했다. 여유는 넉넉히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불덩어리들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중 무엇도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공중에서 폭발하며 연기로 흩날릴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 그 편이 더 안전할 거야.”
고양이는 처음에 화들짝 놀랐지만, 세경을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바닥에 느릿느릿 내려앉았다.
어쩐지 사람 말을 이해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태도가 고분고분했다.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고양이는 도리어 뻔뻔하게 올려다보며 시선을 맞추었다. <뭐? 어쩌라고?> 하는 말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동물병원은 무슨⋯⋯. 검사 받으러 갈 준비나 해 둬.”
세경은 이제 저 고양이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혀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착각할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그건 백 퍼센트 ‘메롱’이었다.
고양이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해서 구해줄 필요가 없어지는 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세경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이상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걸까?
“일단 지금은 거기 가만히 있고!”
주먹을 다시 감았다 폈다. 결계가 두 개로 나뉘었다. 세경을 둘러싼 것 하나, 고양이를 둘러싼 것 하나.
연기가 가신 후 보인 악령 들린 남자의 표정은 예상 그대로였다.
눈동자엔 힘이 풀려 있다.
목은 거북이마냥 앞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어떻게 한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악령으로부터 살아남았잖아! 방금 건 하나만 맞아도 몸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야 정상이라고! 지금까지 이런 적 없었는데!”
그 태도를 보면서 세경이 결론내린 건 두 가지였다.
우선 첫 번째.
남자는 진심으로 등 뒤의 괴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
괴이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어쩌다가 괴이를 다룰 권한을 얻었을 뿐, 초능력은 고사하고 주술 등과의 접점도 없을 테니까.
아는 게 없으니 권한을 어떻게 얻었는지 추궁해도 성과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런. 그간 악령이 마음에 안 드는 걸 다 처리해주니까 좀 편했던 모양이지?”
아무 일 없이 조사관에게 넘길 수는 없다.
역시 한 대 날려야겠다. 그것이 세경의 두 번째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위험을 감지했는지 남자의 등 뒤의 악령은 제 멋대로 눈을 빛냈다. 하지만 세경은 눈이 채 다 빛나기도 전에 이미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나, 나는 잘못 없어!”
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리는 1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딱 다섯 걸음이면 충분했다.
“악령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 녀석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세경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첫 번째 걸음을 뗐을 때까지도 악령의 눈엔 불이 차오르지 않은 채였다.
두 번째 걸음을 뗐고 나서야 악령의 눈에서 불기둥이 뻗어 나왔지만, 불기둥이 바닥에 닿았을 때 세경은 이미 네 번째 걸음까지 내딛은 뒤였다.
그 시점에서 악령은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무죄라니까!”
세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주먹을 뻗었고, 그래서 거두지 않았다.
주먹은 그대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남자의 턱에 매섭게 꽂혔다.
으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남자는 충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의식을 잃은 듯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세경의 숨소리는 여전히 정돈된 채였다.
“조사관에게나 이야기 해, 그런 건.”
고개를 들어 지금껏 남자를 보호해 주던 악령을 올려보았다.
악령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가루로 변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닻 역할을 하던 존재가 의식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1-9-1. 현재의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기관울 부르는 응급번호였다.
“고생 많으십니다. 신재윤 조사관 연결 부탁드립니다.”
반대쪽을 돌아보니 고양이는 여전히 제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나에요. 좀 전에 괴이와 조우했습니다. 해결하긴 했는데, 계약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현재 혼수상태라서 처리하리가 곤란합니다. 사람 좀 보내주시죠.”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잔소리가 임박했지만 세경은 아랑곳 않았다.
“내가 이랬던 게 한 두번도 아니잖아요. 예, 반포입니다. 나야 늘 그쯤에 있죠.”
불평을 털어놓는 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포박 정도는 해 놓을 테니까 사람들 걱정은 말고요. 내가 빈 말은 안 하잖습니까.”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입에 재갈이 나타나고, 손발이 밧줄로 순식간에 묶였다.
다시금 괴이가 나타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괴이는 엄연히 살아 있는 존재다. 자기 계약자가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 이해하고도 힘을 빌려줄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사후 처리는 안 해도 돼요. 딱 당신네 요원들이 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 점은 확실해요.”
세경은 잔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괴이가 도심에 나타나면 대응 프로토콜이 있다던가, 호출기도 번듯이 있으니 미리 이야기를 해주면 좀 더 편하지 않냐던가.
다 맞는 말이라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당신도 나 같은 녀석이랑 어울리느라 고생이 많겠지. 당분간은 귀찮은 일 안 시킬 테니 여름 휴가 계획이나 잘 짜 둬요. 이만 끊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메시지가 하나 와 있는 게 보였다.
발신인은 ‘후배 1호’. 내용은 아까 보낸 것에 대한 답장이었다.
<선배, 고양이한테 초코 우유 같은 거 먹이면 죽습니다. 내일 보러 갈게요.>
잠시 멈칫했다.
고양이가 죽는다는 말인가? 아니면 세경을 죽도록 잡을 거라는 뜻인가?
너머를 바라보니 고양이는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참으로 얌전했다.
도대체 어떻게 열었는지 초코 우유 병을 이미 다 비웠다는 점만 빼면.
세경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한숨 소리가 무거웠다.
“살아 있어?”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야옹.
“초코 우유를 통째로 마셔도 아무 문제 없는 유형의 고양이인 모양이지, 넌?”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야옹.
“꽉 잠긴 유리병의 뚜껑을 알아서 열 수 있는 고양이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아예 대답하지도 않았다. 보면 모르냐는 태도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일 보러 온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다. 다시금 고양이를 안아들었더니 품이 제 것인 양 여유롭게 기대기까지 했다.
초코 우유는 마셨지만 고양이는 멀쩡하다.
고양이가 우유가 담긴 병의 뚜껑을 알아서 땄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고양이다.
이 셋 중에 과연 무엇을 제일 놀라워해야 할까? 세경은 이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가 가장 바라는 건 얼른 집에 가서 이 고양이를 쿠션 위에 내려놓고 자는 것뿐이었다.
그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