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 Eye of the Tiger (1)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세경은 편의점을 나서며 다시금 왼손에 든 장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양을 사고 말았다.
늘 그렇듯 사나흘치 분의 커피면 충분했는데, 일주일 분에 초콜릿 맛 우유까지 덤으로 사버렸다. 거의 세 배 가까운 양을 지출했다.
이건 다 열 개 가격에 열네 개를 팔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누구나 다섯 개 가격에 여섯 개 사는 걸 두 번 할 바엔 차라리 열네 개를 한 번에 살 것이다.
캔커피를 열 개 사면 초코우유는 또 반값이다.
상술이라는 건 알았지만 결국 카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두 배쯤 무겁긴 했지만 집까지 들고 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냉장고 정리를 또 다시 해야 할 것 같다는 게 골치아플 뿐이었다.
설거지나 청소는 쉽지만, 냉장고와 방을 정리하는 건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냥 귀찮을 뿐일수도 있었다. 언젠가 날 잡아서 제대로 정리해야겠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미룰 순 없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세경은 짧게 한숨을 뱉었다.
다음 주 화요일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손님 맞는 날’이다.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잔소리 속에 있어야 할 건 불 보듯 뻔했다. 적어도 주말 안으로는 집안일을 마무리지어두어야 했다.
‘적어도 주말에 할 일 없이 누워만 있진 못하겠군.’
세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장바구니를 들어올렸다. 어깨에 메려던 차에 누군가 달려오다가 어깨를 부딪혔다.
무거운 소리가 났다. 일부러 부딪힌 것 같진 않았다.
부딪힌 남자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계속 비틀거렸다.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비틀거리다가 이내 주저앉는 걸 보니 오히려 걱정될 정도였다. 숨소리가 가쁜 걸 보니 제대로 호흡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까?”
세경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는 심하게 충혈되어 있었고, 다크서클은 지나치게 진했다.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세경은 주저앉은 남자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그걸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힘들어 보이시는데요.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의사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고맙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다시금 비틀대며 세경을 지나쳐갔다.
“이봐요, 그럴 바에는 한 번 가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더 멀어지기 전에 한 번 더 불러보았지만, 이번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계속 불러봐야 들릴 것 같지 않았다. 세경은 가던 길이나 계속 가기로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계속 도움을 받으라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몸 상태도 나빠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운 듯 구겨져 있었다. 저마다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도움을 구해도 나쁠 일은 없지 않을까.
결국 세경은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무슨 문제인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필수적인 정보도 없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고 해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사나흘 간 하루 세 시간씩밖에 못 잔 건 세경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만큼 생각이 예리하지 않은 것은 사실 당연했다. 아까 그 남자의 괴로운 표정이라던가, 어딘가에서 애처롭게 들려오는 고양이 소리 때문에 생각이 방해받는 것도 당연했다.
‘잠깐, 고양이 소리?’
세경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 골목은 원래 고양이가 자주 드나드는 길이 아니었다. 낮에는 청소용 오토모빌이 지나다니고 밤에는 취객이나 치안경비대가 돌아다닌다.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낮이며 밤이며 주구장창 가로등이 켜져 있으니, 고양이가 선호할 법한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분명 고양이의 것이었다.
세경은 잠시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고정된 장소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 보니 역시나였다. 누군가 함정을 팠는지, 고양이가 구덩이 안에 갇혀서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철판을 구덩이 위에 올려놓았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나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늘 운이 안 좋은 건 피차일반이구나.”
철판을 들어올려 치우자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 구덩이를 탈출했다. 처음엔 그대로 도망갈 줄 알았지만, 도망가긴 커녕 세경의 바로 앞에 앉아서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아쉽게도 세경에겐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디 다쳤나?”
고양이는 야옹,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시간에 동물병원이 열었을 리 없지. 불편하겠지만 일단은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여기보단 훨씬 안전할 거야.”
세경은 허리를 숙여 고양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고양이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얌전히 있지 못하고 자꾸 발버둥이었다.
“그래, 불편하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널 거기 내버려두면 내가 오늘 잠을 못 잔다. 포기해.”
세경의 머릿 속에 문득 궁금증이 하나 생겨났다.
사료는 사면 된다지만, 마시는 걸 뭘 줘야 하지? 커피를 주는 건 안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물로 충분한가? 우유는 마시나? 이런 쪽으론 알아본 바 없었다.
다행히 휴대전화는 오른쪽 손으로 꺼낼 수 있었다.
난동부리는 고양이를 애써 무시하고, 전화를 열어 메시지를 작성했다. 수신인은 ‘후배 1호’로 저장되어 있었다.
<갑자기 미안. 고양이를 주웠다. 얘한테 커피 우유 줘도 괜찮아?>
도로 전화기를 집어넣었다.
아마 귀가하고 나면 답장이 와 있을 것이다. 늦어도 내일 아침까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라면 환장하는 남자가 이런 질문에 답장하지 않고 어떻게 배긴단 말인가?
돈을 걸라고 하면 걸 수도 있었다.
재울 만한 장소는 집을 정리하면 자연스레 마련될 거고, 식사는 믿을 만한 정보원이 알아서 적절한 메뉴를 제안해 줄 것이다. 분명 다른 문제가 또 생기겠지만 그건 그 때 가서 해결방안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고양이라니.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동물을 집에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품 안의 고양이는 여전히 불만스러운지 계속 버둥대고 있었다.
“토요일 오전에 동물병원이 열길 바라자. 너도 주말 내내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건 싫을 거 아냐.”
“야옹.”
“그렇겠지, 네가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결국 세경은 고양이와 ‘소통’하려는 시도를 관두었다.
어쩔 수 없다. 다친 곳이 없다고 판명이 난 뒤 좀 더 적당한 보호자를 찾아줄 수밖에.
“다, 당신.”
등 뒤에서 누군가 다급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까 스쳐 지나간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비틀대지 않았다. 하지만 충혈된 눈동자나 창백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아까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세경은 차분히 응대해주려고 했지만, 남자가 먼저 입을 뗐다.
내용은 예상 외였다.
“고, 고양이를 구해줬나요? 내가 겨우 거기에 묻어놨는데.”
세경의 품에 안겨 있던 고양이가 이제야 조용해졌다.
“돌려줘요. 걔는 거기 묻혀있어야 돼요. 죽어야 된다고요.”
“미안한데, 제정신입니까?”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았다.
세경이 거절하자 남자는 앞니를 위아래로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두세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열 번이 넘고 스무 번이 넘도록 멈추지 않았다. 고양이를 내놓으라는 요청을 거절할 때마다 부딪히는 소리는 더 강해졌다.
남자는 이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며칠 째 잠도 못 자고 머리도 깨질 듯 아파요. 그 고양이를 죽이면 다 끝난다고 악령이 그랬다니까요!”
“아프면 병원에 가시죠.”
잠도 못 자고 두통에 시달린다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와 남자의 개인적 증상에 연관이 있을 리 없다. 세경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침착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이미 제대로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이 남자에겐 고양이는 물론이고 아무 것도 줄 수 없었다.
남자는 그 동안에도 계속 앞니를 부딪히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앞으로 홱 내밀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때문에 악령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어.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모른 척 했다면 이런 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텐데!”
“헛소리하지 마시고요. 악령 같은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럼 한 번 보던가! 이 녀석 때문에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니까!”
악을 쓰던 남자의 뒤에서 불길이 갑자기 솟구쳤다.
세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무 것도 없는 도로에서 저렇게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건 초능력자밖에 없었다.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커졌다.
남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마구 내뱉었다. 개중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욕설이었고, 전체적으론 그냥 비명소리에 가까웠다. 이제 자기 감정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 초능력자면 정말로 병원에나 가. 민폐잖아!”
“초능력은 뭔 놈의 초능력이야! 이 놈만 아니었으면 이따위로 안 살았어!”
불은 남자가 서 있는 도로를 벗어나지 않았다. 태울 것도 없는데 점점 거세졌다. 불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붙지도 않았다. 초능력자가 만들어낸 불의 전형적 예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타오르던 불은 점차 구체의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완전한 구체는 아니었다.
중간쯤에는 타원형 구멍이 두 개, 그 바로 아래엔 물방울 두 개를 맞붙인 모양의 구멍 하나. 그보다 더 아래엔 둥근 모서리의 사각형이 스무 개 정도.
종합해 보면, 분명 해골의 모습이었다.
이쯤 되니 세경도 어이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허, 이런 이야기였어?”
남자는 이제 거의 목 놓아 소리지르는 중이었다. 자기가 얼마나 크게 말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 놈 때문에 세 달째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 해. 이게 다 저 고양이 때문이야, 저 고양이를 빨리 죽여야 돼, 그러니까 죽이게 빨리 내놔!”
남자가 말을 끝맺자 등 뒤에 있던 해골의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텅 비어 있던 눈이 순간적으로 불꽃으로 가득 찼다. 짧은 찰나였지만 세경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직후 그 안에서 불꽃이 미사일처럼 그를 향해 발사되었다.
제 때 몸을 날려 피했지만 장바구니까지 온전히 지켜내진 못한 모양이다.
덜그럭, 쨍그랑. 캔들이 빠져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장바구니가 불길에 닿아 한쪽이 날아가 있었다. 커피우유 병만큼은 떨어지기 전에 손으로 잡을 수 있었지만, 그걸 다행으로 여겨도 될 만큼 상황이 좋진 않았다.
불길이 닿은 곳을 보니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온도가 여간 높은 게 아닌 듯했다. 닿으면 무사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세경은 본능적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말라 있었다.
“내놓고 갈 길 가면 되잖아! 그 고양이를 구해서 뭐 받는 거라도 있어!?”
여전히 고양이는 품에 잘 매달려 있었다.
꽤 기특했다. 집에 돌아가면 일단 간식부터 주문해야겠다 싶었다. 츄르라고 하던가.
“당신은 꼭 뭐 받는 게 있어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모양이지?”
세경의 반문에 남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니 한계에 이른 것 같았다.
“그렇게 잘났으면 고양이랑 같이 죽어! 뒈져버리던가 해!”
남자의 뒤에 있던 해골이 이번에는 입을 벌렸다. 순식간에 입 안이 새빨간 불길로 가득 찼다. 아까 것보다 양도 많았고 색도 더 진했다.
해골은 곧장 화산마냥 입에서 불덩어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불덩어리들은 얼핏 보면 우박 같기도 했다.
경찰서에서 진술한 대로 초능력이 있긴 하지만, 진술한 대로 세경은 그 초능력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 뭘, 어떻게⋯⋯ 전부.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고양이가 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택할 수 있는 전략은 평소보다 제한되어 있었다. 뭐가 되었든 고양이가 다친다면 이 싸움은 이토록 진지하게 임하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고양이를 온전히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눈 앞의 저 악령보다도 훨씬 더.
한 번 깊게 심호흡을 하고, 앞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했다. 남자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운이 좋다면 저 얼굴에 주먹을 한 번 꽂아서 기절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위험이 다분했고 턱없이 무모했지만 한 번 해볼 만한 전략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날아오는 불덩어리들은 갈수록 느려졌다. 마치 시간이 멈추는 것처럼 느려지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거리를 좁히고도 남을 것 같았다.
잠깐, 시간이 멈추는 것처럼?
남자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도중에도 감각이 살아 있구나.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예리한 건 분명하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돌아보니 여자가 있었다.
세심히 주조된 금괴처럼 흰색과 금색을 잘 섞어놓은 빛깔의 머리카락. 기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보랏빛의 눈동자. 머리 뒤에는 눈동자와 같은 색의 리본.
분명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지만, 어쩐지 나름 친근한 감이 있었다.
그도 당연했다.
“이야기 좀 해. 정말이지, 언제까지 내 목소리를 무시할 거야?”
세상에 자기 초능력을 알아보지 못할 초능력자는 아마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