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J12P

Prologue: All Along the Watchtower (2)

2025/10/14 업로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활기를 띄었다.

“그래서, 요즘은 뭐 하고 지내세요?”

“의뢰가 있으면 해치우고, 없으면 그냥 휴일인 셈 치죠. 프리랜서가 다 그렇잖아요.”

채원이 매끄럽게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덕분에 세경도 부담 없이 회답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함 없이 어울렸다.

“기업에 소속되어 계신 건 아니구나. 의외네요, 요즘 실력 좋은 사람은 다 기업에서 데려가던데.”

정부 요원이 그렇게 말하는 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지난 세기와 비교해 성좌들이 인간의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괴이 출몰도 잦아졌다. 몇 가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많은 국가는 그 전통적 기능 중 적잖은 부분을 민간 기업에 이양해야만 했다.

“앞으로도 청목관이 내 소속입니다. 윗사람을 모시면서 살 생각은 없으니까. 아랫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도 않고요.”

기업에 소속되는 것은 결코 나쁜 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안다. 더 많은 기회가 보장된다. 더 큰 소득을 얻을 수 있고 더 높은 자리에도 오를 수 있다.

당연히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올라가야 할 계단이 많다. 중간에 고꾸라질 수도 있고 치명적 실패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적이나 실력이 충분히 입증되어 있다면 중턱은 물론이거니와 정상 근처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크나큰 영광과 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서초는 언제나 더 많은 인재를 갖고 싶어 해요. 눈이 너무 높으니 어지간한 수준의 경력은 거들떠보지도 않죠. 하지만 정작 서초가 탐내는 인재는 서초의 길에 별 관심이 없더군요.”

“성공을 위해 악마와 거래하는 것만큼 성공으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 물어볼 때마다 그는 똑같이 이야기하곤 했다.

이 나라에 서초 그룹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말이야 거대기업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미 한국이라는 국가가 돌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정부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관계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다.

네트워크 통신망이나 휴대전화 공급을 독점한다. 가장 인기있는 범용 메신저의 전용 보급권도 있고, 첨단 부품이나 군수물자의 생산도 전담한다.

일거리가 많은 만큼 업무 강도도 비정상적이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끼는 건 당연하고 피를 토하거나 쓰러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서초 그룹에게 직원들의 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든 고쳐내기 때문이다. 물리적 부상이든 탈진이든 상관 없다. 성좌의 기술을 통해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킨다.

물론 정신적 부상까지 회복시킬 순 없다. 급여나 복지가 다른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세경도 초청장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읽어본 적도 없었고 제안을 검토해본 적도 없었다. 초청장을 받아 기업에 몸을 담은 사람은 여럿 알고 있다.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거대기업만큼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달리 없으니까. 그는 더 큰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는 거군요, 그렇죠?”

세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대신 거꾸로 질문하기로 했다.

“오늘은 정말로 쓰레기를 버리러 오셨던 건가요?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채원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세경의 눈동자는 투명했지만 속마음은 읽을 수 없었다.

이번 만남은 실제로 우연히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채원의 상사들은 과연 정세경이라는 남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재인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 일을 간섭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체계가 꽉 잡힌 조직에 들어오라 권유하는 게 의미 없는 일일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분명한 건 분명히 해 두어야 했다. 그건 세경이 대화하기 즐거운 남자라는 것과는 별개였다.

실제로 그에겐 여러 이상한 소문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꽤 섬뜩하긴 했지만 그 중 무엇도 지금 당장 캐묻고 넘어갈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조사해야 할 게 많았다.경험 많은 조사관답게 채원은 분위기를 날카롭게 만들어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부인하기 어렵군요. 정부 소속으로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뭣하지만 떠도는 소문들이 심상찮아요.”

“예를 들면요?”

“들어보신 적 있으실 걸요. 정부가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던가, 곧 전쟁이 난다던가. 요즘은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다른 두 개는 몰라도 마지막 건 들어본 적 있었다. 사실 들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연말연초가 늘 그렇긴 하지만 올해는 특히 더했다. 정부가 세간에 비밀로 하고 정체불명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세간에 파다했다. 북방지역을 점령한 초고위험도 괴이 베헤모스와의 결전을 준비하는 중이라던가, 거꾸로 곧 베헤모스가 남하할 것이라던가. 그 외에도 떠도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세경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프리랜서이니만큼 정보의 동향을 어쩔 수 없이 체크해야 했을 뿐이다.

“가뜩이나 월초에 있었던 일로 윗분들 생각이 복잡하신 모양이에요. 평소라면 무시하고 끝났을 일인데도 이렇게 현장의 분위기를 살피게 됐죠.”

채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혹시 메시지 받으셨어요? 종말론 같은 걸 주저리주저리 적어놓았다던지, 제목 아래로는 사람 말이 없다던지.”

“예, 있죠.”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사실관계만 깔끔하게 전달했고 꾸며내는 말 하나 없었다.

“제가 조언 드릴 입장은 아니지만, 가급적 그 메시지에는 대답하지 마세요. 정부에서 어떤 정보를 감추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라도 있나 봐요?”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거든요. 지금 의심되는 건 두 가지예요.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작동하는 바이러스거나, 아직까지 알려진 적 없는 방법으로 암호화된 코드거나.”

곱씹어 보면 세경이 생각하기에도 찜찜한 점이 꽤 많았다.

“확실히 그런 메시지를 보낸 의도가 썩 건전하진 않을 것 같네요.”

“아침에 나오면서 수사관들에게 물어봤는데 아직까지 명확히 알아낸 건 없대요. 하지만 위험한 것만큼은 알겠다면서 네트워크를 쥐 잡듯이 뒤지고 있던데요.”

채원은 지갑에서 작은 종이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명함이었다.

“평범한 스팸 메시지인게 모두에게 좋을 텐데 말이죠. 얼마든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니까⋯⋯. 나중에 자세한 정보를 얻게 되면 꼭 알려 주세요.”

명함은 인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뻣뻣했다. 건네받아 살펴보니 이름과 직책, 전화번호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송채원, 공공질서재정관리국 이차원사고조정실 주임, 열 한 자리.

“괜찮은 리액션이 나올 것 같진 않지만⋯⋯ 그렇게 할게요. 몸 조심하세요.”

“세경 씨도요. 흉흉한 시절이니까.”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서로 같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목례했다. 그는 새로 만든 친구를 정성을 담아 배웅했다.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하나 빠지니 주변이 묘하게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꽤 많은 일이 지나간 것 같은데 아직도 해가 중천이었다. 하루를 마감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사무실 안에 돌아오니 바깥 바람과 햇빛으로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세경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작했다. 잔소리들을 흘려듣지 않은 게 늦게나마 제 값을 한 셈이었다.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소파에 기댔다. 텔레비전을 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잡다한 생각이 떠오르는 걸 어렵지 않게 정리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 슬 밀려올 무렵 아까 받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노트북 화면에 크게 띄웠다. 다시 읽어도 어처구니 없는 제목이었다. “당신의 삶이 꿈처럼 느껴진 적이 있습니까”라니, 누가 봐도 사기꾼 아니면 사이비들이 할 법한 말이었다.

[#9F 2!A 29! !9Q 0K2 4^8 3e♭ 0Na 8&p R3( 6%b 19$e ⋯⋯]

비슷한 문자열이 화면 창을 다 뒤덮을 만큼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한참 바라보던 중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히 8&* 21%3 6N9 i9+ 당신들 중 누군가 7mR 10vW T2R 위험이 4$w z5$ 다시 반복합니다! #9a Re1 ⋯⋯]

>유효성 검증 완료!
>논리패턴 변형을 시작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시선 왼쪽 위에 또렷히 적히는 글씨가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디서였는진 기억해낼 수 없었다. 편두통이 바늘처럼 미간을 찌르는 통에 더 깊게 생각에 잠길 수 없었다.

[경고합니다. 대답하지 마세요! 대답하지 마세요! 대답하지 마세요!]

내용 자체는 바뀐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젠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메시지의 본문이 임계점 이상의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지성체들에게만 이해되도록 설계하였습니다. 당신의 현실이 지금 이 순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메시지를 이해했다면 대답하지 마십시오!]

세경의 머릿 속에 통찰이 쏜살같이 스쳐지나갔다. 이것은 암호 같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암호화된 게 아니었다. 발신자가 미리 설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만 읽을 수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당신이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 현실은 꿈처럼 무한한 분기점 중 막연한 하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대답한다면 내 동족들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의 현실은 침략당해 정복당할 것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침묵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침묵하세요! 침묵하세요! 침묵하세요!]

곱씹을수록 그 의미는 무겁고 서늘하게 다가왔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메시지에 적용된 기술도 처음 보는 것이었고 쓰인 표현들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임계점 이상의 재능이란 무엇일까? 이 현실이 분기점 중 하나라는 말은 무슨 뜻이지? 정확한 위치를 안다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애초에 이 모든 게 사실이긴 한 것인가? 사실이라면 뭐하러 굳이 메시지를 보낸단 말인가? 대답하지 않길 바란다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될 일인데도.

메시지를 끝까지 내렸다. 이제 거기엔 ‘대답’ 버튼이 여전히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경의 머릿 속은 해답을 찾을 길 없는 질문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되자 그는 그냥 손을 쭉 뻗어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이럴 때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잠깐 눈을 붙이는 게 제일이었다.

일단 낮잠을 자자. 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래, 분명 저녁에 생각하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세경은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머리 한 구석으로 치우고 눈을 감았다. 그는 머리를 비우고 낮잠에 빠지기 위해 심호흡을 거듭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 메시지를 언젠가 이미 봤던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 Prologu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