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J12P

Prologue: All Along the Watchtower (1)

2025/10/10 업로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거리의 분위기는 제법 삭막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들뜬 기색 없이 한 해를 잘 넘겼다는 사실을 씁쓸히 자축할 뿐이었다.

차원을 넘어 온 괴이들의 공격으로 한국에 재난이 일어난 것이 처음은 아니다. 멀게는 1997년부터 가깝게는 2020년까지 괴이에 의한 슬픔은 나라를 떠난 적이 없었다. 2024년도 마찬가지였라는 게 슬픈 일이었다. 새해를 마냥 기분 좋게 시작할 수는 없었다.

해가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충격이나 상처는 아직까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년과 비교하면 인파의 크기가 훨씬 작았다. 제야의 종이 울리고 난 뒤에도 도시의 공기는 무척 무겁고 서늘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청목관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서교동과 연남동 사이에 자리잡은 청목관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검증된’ 해결사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의뢰가 밀리면 밀렸지, 그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2022년 말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2024년 말의 공포가 사회를 덮치면서 해결사들의 주머니 사정도 마냥 여유롭지만은 않게 되었다.

이렇게 경제가 나쁠 때는 직급이니 단계니 하는 건 무의미하기 마련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실제로 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내 잡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세경은 언제나 발로 뛰어다니며 일거리를 수주해 오는 타입이라 크게 영향을 받진 않았다.

[청목관 엔지니어 정세경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도 수리해 보내주신 터빈은 감사히 받았습니다. 귀하께서 서초 공업에 선보이신 특출난 솜씨는 저희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대금은 예정대로 이번 달 10일에 입금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온 것은 서초 공업의 회계 부서였다. 한국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로부터 이렇게 안정적으로 일거리를 받을 수 있는 독립 엔지니어는 결코 많지 않았다.

요즘 시대에는 누구에게나 하나쯤 초능력이 있다. 세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터넷을 둘러보면 초능력으로 으스대는 인플루언서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능력에 한 번도 특별한 의미를 둔 적이 없었다. 그의 이름값을 높여준 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엔지니어로서의 손재주였다.

[제공해 드린 서비스에 만족하셨다니 기쁩니다. 언제든 맡기실 일거리가 있다면 이 채널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채널 통신을 끊고 나니 새삼 사무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피자 박스가 책상 한 켠에 탑처럼 쌓여 있었고 금이 간 선반들은 대충 수리해놓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빈말로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사실 쓰레기통이 제 때 비워지고 있다는 것만 빼면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일주일 넘게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낮은 한숨 소리가 방을 채웠다.

세경은 말 없이 달력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 칸에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사무실을 멋대로 쓰는 것은 온전히 그의 권리다. 하지만 계속 이 상태로 놔두면 곧 찾아올 손님이 잔소리하는 것도 계속 듣고 있어야 했다.

그건 사양이었다. 방 안을 정리하기로 했다.

책상 위에 가득 늘여진 피자 박스를 켜켜이 겹쳐 쌓더니, 커다란 종량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다른 쓰레기들도 무심한 손길로 욱여넣고 나면 봉투는 무척이나 부풀어 있었다. 세경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봉투를 아랑곳 않고 한 손에 들었다.

문 밖을 나서니 아침 공기가 생각한 것보다 매서웠다.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여름은 갈수록 더워지고 겨울은 갈수록 추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충분히 버틸 만 했다. 사무실 안으로 도로 들어가진 않았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바람이 세게 불었다. 엘리베이터가 마련된 빌딩 내에 자리를 마련했다면 조금 더 편했겠지만, 근래 집값을 고려해볼 때 마포구에서 그런 걸 바라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손에 들려 있던 쓰레기 봉투를 인지했는지, 멀리서 바퀴 달린 재활용 로봇이 다가왔다. 세경은 말 없이 봉투를 내밀었고 로봇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었던 봉투는 두 손 안에 들어가자 금세 압축되며 쪼그라들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서울시의 깨끗한 환경은 시민의 협조로 만들어집니다!”

로봇의 몸통에 부착된 모니터에 삐빅, 하고 무언가 나타났다. 오늘의 공기가 얼마나 깨끗한지, 도시의 에너지 소모량은 어떤지 등을 그래프로 만든 자료였다. 그걸 머리 부분에 크게 표시된 웃는 이모티콘과 겹쳐 보니,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재활용 로봇을 좋아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때, 옆에서 로봇에게 다른 봉투를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야청과는 다르게 소매가 두꺼웠다. 누가 봐도 분명 따뜻할 것 같은 옷차림이었다.

“이 로봇, 정말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다들 귀엽다고 하더라고요.”

고개를 돌려 말을 건네온 쪽을 돌려보니, 롱 패딩을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낯익긴 했지만 누구인지 기억해낼 순 없었다. 세경은 가볍게 목례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군요. 귀여운 것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요.”

“이용자들이 친근감을 갖게 하면 파손 빈도도 줄고 효율도 올라간대요. 후추통 모양의 몸체부터 내부 회로까지 심혈을 다해 설계한 보람이 있는 거죠.”

세경은 디자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눈 앞의 로봇은 몸이나 팔이 둥글넙적하고 표정도 풍부하니 귀엽다고 평할 구석이 분명 있었다. 그는 미적 감각이 뛰어나진 않아도 솔직하게 말할 법은 아는 남자였다.

“훌륭한 분석이군요. 정부에서 일하시나요?”

“송채원입니다. 이차원사고조정실에서 일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자는 눈을 두어 번 빠르게 깜빡였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서 잡담을 하게 될 줄은 몰랐고, 상대가 정부 쪽 관계자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마찬가지로 직업을 포함해서 대답하는 게 공평해 보였다.

“정세경입니다. 청목관에서 일하는 독립 엔지니어고요.”

“아, SNS에서 몇 번 접한 적 있어요. 이 근방에 사신다는 건 대강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뵐 줄은 또 몰랐네요.”

“제가 이 근처 어딘가에 사는 걸 알고 계셨다고요?”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스스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지금껏 없었다. 그는 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더 질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요. 스스로 얼마나 유명한 지 모르시는구나?”

“실제로 처음 들어요. 조금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요즘엔 초능력자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가수라던가 배우랑 다를 게 없죠. 표정을 보니 스스로는 모르셨던 것 같지만요. 제 생각에는⋯⋯.”

채원의 말은 갑작스레 끊겼다. 두꺼운 패딩의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벨소리가 울려퍼진 탓이었다. 여유 넘치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엇, 급한 연락이군요. 잠시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

채원은 다급한 걸음으로 후다닥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경은 고개를 작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처음에 살짝 낯익긴 했지만 두 사람은 역시 오늘 처음 본 사이였다. 알고 지내긴 커녕 지금껏 서로 스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놀라웠다.

문득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확인해 보니 채널에 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지금껏 교류한 적 없는 연락처였다.

세경은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스팸 같진 않았다. 인터넷 링크도 없고 첨부 파일도 없었다.

제목은 <당신의 삶이 꿈처럼 느껴진 적이 있습니까>라는 한 마디뿐이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쓰인 건 그게 다였다. 메시지 본문은 숫자와 알파벳, 특수문자를 무작위로 하나씩 사용한 세 자리의 문자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메시지는 스크롤을 계속 내려도 끝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길었지만, 아무리 내려도 언어는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죄송해요, 직장에서의 연락이라 무시할 수가 없어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고개를 드니 채원이 통화를 끝내고 다가오고 있었다. 세경은 잠시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도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오늘은 여유가 많았다. 작업실로 돌아가면 시간을 들여 분석할 수 있었다.

이런 걸 계속 들여다봤자 시간만 낭비할 게 뻔했다. 그는 정체불명의 메시지로부터 잠시 관심을 끄기로 했다.

Prologue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