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J12P

Episode 10: Hooked On A Feeling

2025/10/16 업로드

세경은 오른손으로 지끈대는 이마를 짚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곱씹을수록 더 기운이 빠졌다. 강제로 과거를 파헤치느라 새벽을 매우 거칠게 보냈기 때문이다.

“나쁜 꿈이라도 꾸셨어요? 사무실 악령, 정말 만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내 걱정 안 해도 돼, 아니에스. 연구에 매달리다가 자는 게 늦었을 뿐이야.”

세경이 신임 교수로서 맡은 사무실에는 이상한 소문들이 몇 개 있었다. 찬장 위에 잘 올려 둔 물건이 갑자기 넘어진다던지, 다른 방은 다 멀쩡한데 혼자 전기가 나간다던지. 바깥에 바람이 세게 부는 밤이면 비명소리가 들린다고도 하고, 목 없는 사람이 서성이는 걸 보았다는 사람도 여럿이다.

신경쇠약을 얻어 나간 사람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심지어 자살한 사람까지 있다는 모양이다. 여러 사람들이 해결하려고 골머리를 앓았던 모양이지만 그간 성과는 없었다고 한다.

입주자에게 불운을 주는 방을 쓰고 싶어할 사람은 없다. 기존에 근무하던 교수들은 물론이고 새로 부임한 교수들도 그 사무실을 쓰는 걸 피했다. 그렇게 세경이 차지하기 전까지 계속 주인 없이 비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이 사무실은 장점이 꽤 많았다. 도서관이 바로 한 층 아래에 있고 연구시설과도 가깝다. 무도회장이나 학생 기숙사와 멀다는 점만 빼면 지리적으론 더 바랄 게 없었다. 오래 비었던 것치곤 내부도 깔끔했다. 구태여 개선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그렇다. 교수님, 악령 신경 쓸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아니에스는 언젠가부터 이 사무실을 본인 기숙사실처럼 쓰고 있었다.

“다른 교수들도 그렇게 엄청 신경 쓰는 건 아닐걸.”

고개를 단호히 내저었다.

“설마요. 이유 없는 불운이 온다는데 당연히 엄청 신경쓰죠. 여기선 학생들만이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구요. 교수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해요.”

“그래, ‘교류회’ 말이지?”

이카로스에선 매 학기 초마다 교류회를 연다. 이름 그대로 신입생들을 포함해 학교의 모든 인원들이 한 자리에 어울리는 자리다. 이번엔 입학식 바로 다음 주에 예정되어 있다는 듯 하다.

참가는 어디까지나 선택이고 아무런 불이익도 없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찾아올 중요 인사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학년을 불문하고 많은 학생들이 눈독을 들인다는 모양이다.

말이 교류회지 사실상 모의전이다. 학생들은 최대 여섯까지 팀을 이루어 참가하고, 모든 팀은 공통된 목표를 갖는다. ‘다른 팀을 모두 쓰러트릴 것’. 그 외의 목표는 없다.

규칙은 딱 세 가지 뿐이다.

하나, 이미 탈락해서 격리 마법이 적용 중인 상대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 둘, 진행 도중 외부로 나가거나 외부의 자원을 들여와서는 안 된다. 셋, 한 번 승패에 승복했다면 이를 뒤집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규칙을 어겼다면 관용 없이 실격으로 처리하지만, 그 외에는 모든 행동이 적법하다.

승리를 따내기 위해 꼭 상대를 전투로 쓰러트릴 필요도 없다. 정보력처럼 전투 이외의 방면의 실력을 활용해 승리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과정에 잘못된 게 없다면 승리는 정당하다.

가장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것이니까.

“올해는 귀빈 초청도 여럿 했나봐요.”

아니에스가 건넨 팜플렛에는 명단이 적혀 있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나라의 높으신 분들은 물론이고 능력자 조합의 관리직들도 참석하는 모양이었다. 귀빈들의 무게감으로만 따지면 어지간한 정상회담에도 못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손님들을 많이 부르는 행사인가?”

“적어도 지난 해에는 이렇게 많지 않았어요. 흥행 예감, 느낀 걸지도 모르겠네요. 예년의 두세 배는 된다고 하니까.”

세경이 찾는 ‘계약자’ 역시 학생으로서 입학할 예정이었다. 나흘 정도 전 메일로 물어봤을 때 세영은 올해 이카로스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인재들을 받을 예정이라고 설명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히는 것이 본인을 숨기기에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합리적인 결정이다. 힘을 조절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능력자라면 이카로스만큼 숨기 편한 곳이 없다. 여러 세력이 눈독들이는 만큼 흔적을 지우기도 편하고 외부와 단절되는 기간이 긴 만큼 방어하기도 쉽다.

하지만 마냥 숨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세경에겐 ‘계약자’도 교류회에 참가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떤 괴이일지 실마리도 없긴 하지만, 논리를 갖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괴이라면 날뛸 수 있을 땐 화려히 날뛰려 할 테니까.

“그래도 이 정도로 초대하는 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다. 대통령 둘에, 총리도 오고⋯⋯.”

읽어 내려가던 도중 세경의 눈이 중간쯤에서 멈추었다. 공공질서재정관리국의 양현민 국장과 송채원 실장도 참석 예정이라는 듯 했다.

“낯 익은 이름, 있으세요?”

아니에스는 세경의 시선이 멈춰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옛날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을 뿐이야. 별 거 아냐.”

“으~음, 그렇구나!”

그건 납득하지 못한 사람의 말투가 분명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니 가볍게 혀를 내밀 뿐이었다. 세경은 의도를 이해하려 해 봤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도로 팜플렛으로 눈을 돌렸다.

“맞다. 듣기로는 일등상, 굉장하다던데요.”

“뭔데 그래?”

팜플렛에 상품 이야기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상품이 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여럿 있긴 했지만 정작 그게 뭔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었다.

“성좌 본체가 직접 축성한 유물이래요. 칭호, 뭐랬더라? ‘하늘을 거머쥔 매’ 같은 느낌이었는데.”

“화신도 아니고 본체가 직접? 보나마나 높은 계위겠네.”

“두 말하면 입 아플 만큼요.”

괴이마다 힘의 수준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성좌마다 그 힘은 다 다르다. 번호를 붙여서 줄세워 구분하진 않지만 미약한 성좌와 강대한 성좌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있다.

미약한 성좌는 만들 수 있는 계약자의 수에도 물질계에 행사할 수 있는 힘에도 제약이 있다. 본체가 물질계에 행차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힘이 깊다는 증거다. 칭호가 아니라 본명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면 그보다도 한 차원 위의 성좌라는 뜻이 된다. 물론 인류 역사 상 그 수준의 성좌와 접촉한 기록은 단 두 번 뿐이다.

“절도범, 이미 여럿 잡았대요. 작은 규모지만 교전도 있었다고 하고.”

“열심히도 사시는구만, 다들.”

품질이나 등급이 높은 유물일 수록 마력 반응이 크고 깊다. 성좌에게 직접 축성받은 유물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탐지능력자들이 훈련만 제대로 받았다면 어려움 없이 찾아낼 수 있을 테고, 대략적 장소를 알고 있다면 사실 못 갈 것도 없을 테다.

물론 시도하는 것과 성공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이카로스에서도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보안에 조금도 틈을 남기지 않으려 혈안인 것이니까.

“여유가 되시면 파수꾼, 보고 오세요. 교수님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대요.”

왜 만나고 싶어 할지 바로 감이 왔다. 세경은 분명 열차 안에서 있던 일 때문일 거라 확신했다. 이카로스의 병사들과 열차의 병사들은 세대가 다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와닿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열차 안에서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여러 번 느꼈지만, 그들은 그냥 ‘기계 병사’라고 칭하기엔 너무나 잘 설계되었다.

사람이라고 언제나 논리정연히 말할 수는 없다. 가끔은 비문으로 말하기도 하고, 상황과 다른 단어를 쓰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무 논리 없이 억지로 우길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배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다른 사람이 입력하지 않아도 생각해서 깨우칠 수 있다.

단편적이긴 했지만 열차 안에서 141번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자기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단어들과 상정하지 못한 것들 투성이 속에서 계속 생각하고 배우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것은 사람, 나아가 지성체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서초 그룹 등이 언론 인터뷰 등에서 기계 병사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답변을 거부한 게 아니라 답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살아 있는 지성과 다름없는 상태라곤 도저히 말할 수 없었을 테니.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내일 입학식 끝내고 밤쯤이면 시간이 되겠군.”

세경은 머릿 속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대강 정리해 보았다.

입학식은 내일 정오부터 시작이다. 오전에는 학생회에 초대받았고, 끝난 직후에는 교원들간의 간담회가 있다. 그것까지 마무리하고 나면 파수꾼을, 첨단 기술들을 모두 쏟아부어 만든 이카로스의 방패와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길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바쁜 날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경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소리는 더 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자, 다들 간식 먹고 하죠!”

쾅 하는 소리. 문이 발칵 열리며 예은이 양 손에 피자 다섯 판과 탄산음료 두 병씩을 꽉 붙든 채 나타났다.

자연스레 일어나서 피자를 받아들면서도 세경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노라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간식을 사오겠다고 하지 않았었어?”

그런데 예은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교수님도 참. 이 정도면 간식이죠!”

피자 한 판이 과연 간식인가? 이만큼 먹고서도 저녁을 다 챙길 생각인가? 물어보려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물어본다고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예상하지도 않았던 식사를 하게 생겼다. 그래도 무척 맛있어 보였다. 파인애플도 없으니 불만은 갖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