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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 Like A Stone

2025/07/29 업로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예상대로 편하지 않았다. 여름 아니랄까봐, 일기예보에선 한 마디 말도 없었는데 하늘에선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두꺼운 빗방울이 보네트며 앞유리며 가릴 것 없이 한바탕 쏟아졌다.

소리가 너무 컸다. 차라리 바로 옆에서 드럼 두들기는 걸 듣는 게 귀가 덜 아플 것 같았다.

“가끔은 옛날이 그립지 않아? 여름의 비는 장마로 한꺼번에 내리던 때 말이야. 지금처럼 스콜이니 뭐니 하지 말고.”

“성좌도 지구온난화는 못 되돌린다는 모양이잖아.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는 몰라도.”

차의 뒷자리에선 세경의 고양이가 심드렁히 앞발로 눈을 부비는 중이었다.

“성좌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 자기. 인류를 도구로 보는 건 똑같잖아. 충분히 능력이 있더라도 할 생각이 없을 걸?”

“그렇게 부르지 마. 친밀한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

세영은 말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알고 지낸 지 꽤 오래 되었지만 세경은 여전히 그녀가 익숙하지 않았다. 저 붉은 눈동자 뒤에 무엇이 넘실거리는지 생각할 때면 가끔 소름이 돋기도 했다.

“우리들의 파트너십을 그렇게 표현하면 조금 서운할지도 모르겠는걸?”

이번에는 세경이 대꾸하지 않을 차례였다.

두 사람은 과거에 ‘바쁜 비버들 편대’의 1번, 2번으로 함께 임무에 투입되던 사이다. 해산된 지 일 년 반 넘게 지났음에도 현장에선 아직도 그 공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깝게는 이태원동에 나타난 마왕급부터 멀게는 가지안테프를 덮친 재해급까지.
두 사람이 팀으로 활동하며 세운 공적은 결코 작지도 가볍지도 않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두 사람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할 만큼의 명성을 쌓았다.

“농담이야, 서운하긴 무슨.”

정작 두 사람의 태도는 심드렁하다. 마치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그 일들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다. 반대로 치러야 했던 희생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국가적, 세계적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공식 요원으로서 두 사람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었다.

그 임무들 모두가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고 성공적으로 해냈다.

언제나 성공적으로,

가끔은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일 이야기나 하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게 많아.”

“이카로스 기관이라고 들어 봤어?”

새로운 화제의 필요성을 느낀 건 그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영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처음이야.”

“말이 기관이지 사실상 학교야. 얼어붙은 태평양 어딘가⋯⋯ 옛날 웨이크 섬 쯤에 세계 각국이 공동 출자해 건설했지. 세계 여기저기의 유망한 능력자들을 한 군데에 모아서 괴이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함께 육성시키자는 거야. 효과가 있는지는 나로선 잘 모르겠지만.”

몇 번을 생각해봐도 기억 속엔 없는 이름이었다. 세경은 떠올리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처음 들어. 중학교나 고등학교 연령대 용인가?”

“아니, 대학교에서 대학원 정도. 누구들과 별 차이 안 나지.”

세영의 오른쪽 검지손가락이 세경을 가리켰다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도로 핸들로 돌아갔다.

오른쪽 검지손가락뿐만 아니라 오른손 전체에도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왼손과 똑같았다. 손끝에서 시작해서 손목을 지나 팔꿈치 아래 언저리까지, 두 팔 모두 불에 탄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회복 안 됐어, 그거?”

“옛날 일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 자기.”

겉에서 느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무거운 의미가 담긴 대답이었다. 반론할 수 없었다. 세경은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자리를 하나 마련해뒀어. 교수직이야. 당신에게 딱 맞을 거야, 장담해.”

하지만 이번에 들려 온 말은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직장 알선이지. 수상쩍은 곳을 조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부자가 되는 거잖아. 기관 안을 조사해줬으면 해. 가능한 한 상세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굳이 나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바쁜 비버들이 해산한 이래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맞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그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성가신 일들이 내 책상 위에 한가득이야. 둘째, 내가 아는 사람 중 당신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은 없어. 완벽하게 시작해서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그게 누굴까? 어라, 여기 있었네!”

“고세영 국장에게 성가신 것들이라. 예를 들면?”

에휴, 하는 한숨 소리가 짧게 차 안을 울렸다.

“법 만드시는 나리들은 선거 철만 다가오면 우리 직원들을 이용하고 싶어 환장하시는 모양이야. 매일 미디어에 대고 우리가 국가를 위해 개처럼 일하지 않는다고떠들어 대지. 분계선 위나 부산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아시려나 몰라.”

생각해 보면 여러 번 뉴스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오십 년 동안 괴이 출현이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능력자를 모두 국가에 등록시켜서 전산으로 관리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크기만 다를 뿐 둘 다 사실상 불가능한 공약이다.

현재 인류는 괴이가 넘어오는 차원문이 어디에 열릴 지 알아내는 것도, 등록을 거부한 능력자를 강제로 찾아낼 방법도 갖고 있지 않다.

“하.”

곱씹던 중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참을 수 있었더라도 참지 않았겠지만.

“왜 그래?”

“국가의 개라니, 가당치도 않잖아. 당신은 법 없는 세상에서 더 편하게 살 사람인데.”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기 때문일까? 잠깐이나마 세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찰나와 같을 만큼 짧은 시간뿐이긴 했지만 세경은 분명히 보았다.

그녀도 그가 보았다는 걸 분명히 인지했을 것이다.

늘 입가에 걸린 은은한 미소와 별개로 운전석에서 매서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세경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가 딱히 반격용으로 쓸 만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더 말을 얹지 않았다. 결국 다시 화제가 바뀌었다.

“아무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은 당신이 으뜸이야. 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 같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줘.”

“이건 극비야. 당신이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말해준 내용은 들려줘선 안 돼.”

진지한 시선에 세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영은 계기판 아래로 손을 뻗었다. 흐리게 깜빡이는 녹색 버튼울 누르자 계기판을 포함해 차 내부의 전기가 일제히 사라졌다.

“도청 방지용이야. 차는 멀쩡하니까 신경 쓰지 마.”

다시금 시선이 맞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건 많았다.

고세영이 웃지 않을 때는 웃지 않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화 중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는 건 그에게도 오랜만이었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지적 성숙도가 높은 괴이가 지금 이 시점에서 최소 두 개체가 존재해. 투사와 계약도 맺었다는 걸 확인했어.”

과연 진지할 만했다. 웃지 않을 이유로는 충분한 사안이었다.

별명을 가진 괴이는 결코 흔하지 않다. 굳이 별명을 지어 붙인다는 것은 그만큼 인류에게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지금껏 인류가 마주한 괴이 중 손꼽히는 위협에는 하나같이 별명이 붙곤 했다.

그렇게 ‘이름’이 붙은 괴이들은 하나같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남겼다. 하지만 그런 괴이들에게도 투사는 없었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만큼, 나아가 투사를 만들 만큼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신분은 알아?”

“알고 있는 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야.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

“확인한 다음에는 뭘 하면 돼?”

“정부는 당연히 그 투사들을 제거하고 싶어하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거야. 하지만 나는 역시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려. 그래서 내 독단으로 당신을 보내는 거야.”

그제야 본론이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세영은 그에게 정부의 일을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만나러 올 사람이 아니라는 건 세경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다른 선택이 없었으리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역시 한 번 짚지 않을 수 없었다.

“독단이라, 선생님한테는 일 때문에 왔다며?”

“내 일은 희생자를 줄이는 거야. 윗사람 말에 따르는 게 아니라.”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세영이 자기 일에 무거운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세경은 그걸 존중해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 게 뭔데.”

“왜 굳이 이카로스 기관까지 오는 거지? 그 정도 레벨의 괴이와 게약했다면 상황에 따라선 나라 하나를 먹을 수도 있어. 그런 인간들이 얼어붙은 바다에 뭐 볼 게 있다고. 세계 각지에서 인재가 모인다곤 해도 전 세계를 아우르는 것도 아닌데.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어.”

“뭘 것 같아?”

“나야 모르지. 우주의 중심으로 가는 차원문이라도 있으려나.”

우주의 중심이라.

세계에 처음 차원문이 열린 것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차원문 출현은 19세기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적어도 학교에선 그렇게 말한다.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은 차원문의 정체며 창조자 등에 대해 추측하곤 했다. 666번째로 열리는 차원문에서는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대마왕이 나타난다던지, 2000년에 처음 열리는 차원문에서는 신이 재림할 거라던지.

당연히 그 중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도 차원문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다.

“그 미스터리를 직접 조사하러 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

“허어.”

자신만만한 미소가 도로 돌아왔다. 괜히 질문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눈꼬리가 능글맞게 휘어졌다. 열이 치밀어 올랐다.

“당신의 템포와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걱정되지?”

“내가 실언했다. 무시해.”

“안 돼.”

나름 간절한 부탁이었지만, 그녀는 고려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동행하고 싶어. 내 눈으로 보는 게 어쨌든 가장 확실하니까. 하지만 지금 난 조직을 책임져야 하는 몸이라 예전만큼 자유롭진 않아. 시간이 좀 필요해.”

“억지로 요청할 생각은 없어. 여건이 안 되면 안 오면 그만이잖아.”

“우와, 오늘 처음으로 따뜻한 말을 들어보는 것 같은걸.”

세경의 입꼬리가 대놓고 아래로 처졌다. ‘따뜻한’ 말이라니? 화자의 의도와 들어맞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해석이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다. 어이없어 해야 하는지,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따지고 보면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세경은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의식 저편으로 치워버렸다. 세상을 내키는 대로 사는 두 살 연상의 여자를 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역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래도 신경쓰이지 않는 건 아니니까 다시 한 번 물어야겠어.”

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다 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 문을 열 때가 아니었다.

대화를 다 마무리짓지 못했다.

편한 사람이 아니라도 손님은 손님이었다. 찾아와 준 사람과 대화를 다 마무리짓지도 않고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뭘?”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자기?”

여러 번 표현했듯, 세경은 세영과 함께 한 시간들을 그리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간은 허투루 보낸 것이 아니다. 그녀만큼 사실 잘 아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정세경이라는 사람이 한 번 막 나가기 시작할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정 걱정되면 빨리 정리하고 오시던지. 당신이야말로 나 없으면 마음껏 날뛰질 못하잖아.”

세영은 여유로운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가 자기 쪽 창문 아래의 버튼을 누르니 손대지 않아도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그러자 뒷자석에서 잠만 자던 고양이가 순식간에 세경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고양이를 품에 안아드는 자세가 퍽 자연스러웠다.

“당신에게 고양이는 잘 어울리는 선택이네.”

“그래, 이 녀석 생각보다 재주가 엄청 많은 것 같더라고.”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가를 밀어올렸다.

일 분도 안 되는 기간이나마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대장.”

“국장께서도 잘 지내시고.”

주고 받는 인사의 맛은 무척 썼다.

돌아가지 않기로 서약한 과거의 맛이었다. 누구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망각의 바다 너머에 흘려보내기로 했던 시간들의 맛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었음에도 누구 하나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었다.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날 일 없는 게 세상이 안전히 흘러간다는 뜻이겠지?”

“그 편이 사람들이 덜 죽을테니까.”

세경은 아무 말 않고 차에서 내렸다. 차는 문이 닫히자마자 뜸 들이는 일 없이 출발했고 예상보다 이르게 우회전해 사라졌다.

문득 품에 든 고양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궁금한 게 아주 많은 것 같았다.

“너한테 들려줄 건 없어. 어차피 사람 말도 못 하잖아.”

고양이는 불만스러운 듯 눈을 부릅떴다.

머리를 쓰다듬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골골댔지만, 여전히 탐탁찮은 눈이었다.

“사람 말을 배워 오도록 해. 그러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 스스로도 무엇이 다른지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