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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 Live Forever

2025/09/17 업로드

자정을 넘겨 한밤중이었다. 달은 하늘에 고고히 떠 있는데 가로등은 외로이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를 끝내고 깊게 잠들어 있을 시각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새벽이 가장 바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까. 축구나 농구 경기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던지, 미국에 거래처를 둔 직장인이라던지,

불법적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던지.

영하의 기온을 아랑곳하지 않고 골목을 내달리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문규현.

그는 지금껏 특별히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이 살았다. 20대가 절반 정도 지날 때까지 그의 인생엔 그렇게 눈여겨볼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는 지금 쫓기고 있었다. 로봇들은 물론이고 중무장한 군인들도 그를 계속 찾아다녔다. 규현이 무슨 잘못을 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품에 갖고 있는 물건 때문이었다.

사흘 전, 규현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눈길을 끈 제안이 하나 있었다.

을지로입구의 동전 사물함 13번 칸에 든 상자를 서울역 2번 출구 앞 환전소까지 가져오기만 하면 25만 크레딧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착수금으로 7천 5백 크레딧을 준다고도 적혀 있었다. 어이없을 만큼 좋은 조건이었다. 누가 봐도 스팸이거나 사기일 게 뻔했다.

하지만 규현은 기꺼이 제안을 수락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다 어린 나이에도 빚을 졌고 할 수 있는 일도 점차 줄어 미래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나아갈 길도 보이지 않고 부모님과 동생을 볼 면목도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착수금만 받아도 밀린 병원비와 월세는 다 갚을 수 있었고 혹여 성공한다면 더 이상 걱정시킬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그의 품 안에는 작은 정사각형 상자가 들어 있었다. 아주 예사롭지 않았다. 꽉 밀봉되고 자물쇠로 잠겨 있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긴 했지만, 가끔 안에서 새빨간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곤 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 없었다. 의뢰인은 ‘범죄와 아무 관련 없는 일’이라고만 말할 뿐 자세한 정보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2킬로미터 정도 되는 구간 곳곳에 경비대원들과 순찰 로봇이 깔려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많았다. 큰길만이 아니라 작은 골목까지 퍼져 열심이었다.

추적자들로부터 도망치는 동안 규현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대체 품 안에 든 게 뭐길래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할까? 이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는데 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까?

2014년 봄 동해 바다, 2022년 겨울 서울에 이차원 생명체들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을 때 아무도 뉴스에 나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희생자들이 한 마디만 해달라 해도 끝끝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이 작은 박스 하나 때문에 저렇게 많은 군인들을 밖에 나와 검문과 순찰을 서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할 수록 다리가 움직이는 속도가 점차 줄어들었다.

숭례문광장 앞에선 경비 로봇들이 아예 통행 저지선을 세우고 있었다. 더 달려봤지만 염쳔교 앞도 마찬가지였다. 남산육교 앞도 청파동삼거리에도 다르지 않았다.

빠져나갈 길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규현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눈 앞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 ‘초능력’이라는 걸 얻었을 때는 인생이 굉장히 잘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이후에 있었던 즐거운 기억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잠들 때마다 자신에게 발화능력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게 해달라고 바란 적도 있었다.

주먹을 쥔 손이 아팠다. 펴 보니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는 결국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이 걸려 있다. 가족들이 십여 년은 편안히 살 수 있을 만큼 큰 돈이다. 동생의 수술도 막힘없이 해치울 수 있고, 새 집과 새 차를 선물할 수 있을 만큼 큰 돈이다.

여기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착수금은 이미 보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어차피 잡혀 죽을 거라면 가족에게 돈은 주고 죽고 싶었다.

그 때 바로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유닛 5C에서 사령부에. 목표를 찾았다.”

저 멀리서 붉은 불빛이 번쩍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순찰 로봇이 총구를 겨눈 채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긴 했지만 눈이나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둥근 센서 여러 개만 달려 있었다. 아시아권 사람의 피부를 부자연스럽게 재현한 실리콘은 불쾌하다 못해 오싹할 정도였다. 목소리에도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명령 이행, 목표를 회수하겠다.”

규현은 마지막을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동생의 웃는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신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무의식적으로 기도했다.

신이시여. 계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딱 한 번의 기회만 더 주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는 다른 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것만 계속 되뇌었다.

“얼마나 살았다고 벌써 포기를 하는지.”

응답하듯 로봇 뒤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경비 로봇의 허리 부분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전원이 나간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로봇이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건조한 갈색 눈동자. 발목 근처까지 내려오는 긴 회색 코트. 그 아래에는 하얀색 셔츠와 군청색 바지, 새까만 구두. 벨트의 버클은 녹슬었고 단추는 제대로 잠그지도 않았다.

“일거리를 제안받았겠죠? 을지로입구 사물함에서 서울역 환전소까지 화물 운반.”

규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블로그나 SNS에도 아무 내용 올리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아신 거죠? 이런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알아요. 이유가 있었겠지. 이렇게 위험한 일을 두 팔 걷고 나서는 데 이유가 없을 순 없으니까. 하지만 그 물건을 무사히 배송한다고 평범한 삶을 누릴 순 없어요. 그만한 돈이 추적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죠?”

“가족이 굶고 있습니다. 동생에게는 돈이 없어서 간단한 수술도 못 해줘요. 그것만 해결할 수 있으면 전 상관 없어요.”

“헛소리 하지 말고. 당신이 죽었다고 하면 가족들이 퍽이나 즐겁겠습니다.”

남자는 거칠게 쏘아붙였지만 화내는 것 같진 않았다. 여러 모로 특이한 점이 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무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정부도 인류의회도 죄다 당신이 품에 들고 있는 그 상자를 얻기 위해 눈이 돌아갔어요. 상자 배달을 성공하든 실패하든, 돈을 어떻게 쓰든 이 일이 끝나면 당신도 그 주변 인물도 언젠가 제거당할 운명일 뿐입니다. 속으로 분명 짐작하고 있을 텐데요.”

“그래서 무엇을 제안하고 싶으신데요? 선생님에게 상자를 넘겨라? 난 이미 착수금을 받았어요. 내가 여기서 일을 끝맺지 못해서 가족들이 위험해지는 건 더 싫습니다.”

규현은 이제 지쳐 있었다. 현실의 무게를 생각할 수록 어깨나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스스로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더 견딜 수 없었다. 끝낼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으이구. 우리 대장은 사람 마음을 헤아려서 말하는 법이 없어.”

골목 반대쪽에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복부가 약간 드러나는 하얀 티셔츠, 착 붙는 청바지와 붉은색이 섞인 금발. 전반적으로 피부가 깔끔히 흰 빛으로 정돈되어 있었지만 오직 양 팔만큼은 팔꿈치 아래까지 화상처럼 그을린 흔적이 역력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세영 씨. 빠르면 5분 안으로 연락 두절 신호가 갈 거야. 그 때까진 상황을 마무리해야 해.”

“나도 알아. 나한테 맡겨 봐. 대장은 저기서 망이나 보고.”

“제대로 정리했지?”

“입 아플 소리는 하지 말자. 내가 이 일을 하루 이틀 해, 자기?”

남자는 제대로 대꾸도 안 했다. 어깨만 으쓱이고 다른 건물의 그림자 아래로 사라졌다.

“혼란스러우신 것 알아요. 많이 힘드실 거고요. 그래도 알아주셨음 하는 사실이 두 개 있어요.”

애초에 여자도 그런 기대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규현에게 자연스럽게 명함을 건넸다. 받아들자마자 벤치 뒤의 건물 벽으로 향해 기댔다.

확인해보니 직책과 이름만이 간단히 쓰여 있었다. [인류의회 초차원현상대처 특무부대 ‘바쁜 비버’, 부대장 고세영]. 처음 듣는 말 투성이었다. 그 중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그녀의 이름이 고세영이고 맡은 역할이 부대장이라는 것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새 직책으로 명함을 팔 겨를이 없어서요⋯⋯. 앞의 단어 세 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고세영이라고 해요. 성함을 들을 수 있을까요?”

“문규현입니다. 몇 시간 전부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이 상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대체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데요?”

이젠 물어봐야만 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처음 상자를 꺼낼 때까지 계속 이상하지 않았나요? 이런 간단한 일을 왜 그렇게 큰 돈을 주고 시키는 것이며, 착수금은 왜 또 그만큼이나 주는지.”

“궁금했죠. 계속 물어봤는데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그런 질문은 들은 척도 안 하더군요.”

세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안을 받은 사람은 규현 씨만이 아녜요. 많게는 에순 명에게 보내졌죠. 규현 씨가 받은 착수금과 같은 금액을 입금받은 사람들을 이번 주에만 여섯 명 찾았어요. 다 죽었고요.”

“저처럼 상자를 옮기다가 로봇이나 군인들에게 걸린 거죠?”

“아뇨. 상자를 들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 상자는 보호받고 있어요. 자질이 없는 사람은 들기는커녕 만질 수도 없죠.”

예상 밖의 답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잠재력이 있다는 말은 생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질이 있다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규현 씨에게는 초능력이든 마법이든 잠재력이 있다는 겁니다. 엄청나게요. 그 상자를 품에 안고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여기저기서 당신을 주시할 거예요. 어느 날 납치당해서 강제로 계약서에 서명하게 되어도 이상할 게 없을 거고요."

“검사장에서 초능력 적성이 있다곤 했지만⋯⋯ 최저선을 겨우 넘긴 수준이랬었는데요.”

머릿속에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이 일을 시킨 사람은 대체 어떻게 그가 이 상자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까?

한국인들은 성별을 불문하고 열아홉 살이 되면 신체검사를 받는다. 초능력이나 마법에 관한 적성을 체크해서 공인 절차를 안내하기 위해서다. 국가에서 직접 주관하는 만큼 기업이나 법인이 그 결과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말대로 이 일을 시킨 게 정부라면 설명이 된다. 오히려 당연한 노릇이었다.

“검사 몇 번으로 사람의 진가를 어떻게 헤아리겠어요? 그 상자는 아무나 들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대천사 미카엘의 심장이 들어 있으니까요.”

“미카엘의 심장이라니, 문자 그대로의 뜻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심장에는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잠재력이 들어 있어요. 지금껏 그 어떤 존재도 도달하지 못한 기적이라도 실현할 수 있을 만큼이죠.”

“그걸 얻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치 않을 만큼요?”

규현은 들어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군인이나 로봇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일 안 해요. 같이 가시죠.”

세영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 말을 천천히 곱씹는 동안 규현의 입은 점점 크게 벌어졌다. 믿기 어려운지 떡 벌어진 입을 한참 동안 다물지 못했다.

“당신들⋯⋯ 기적술사군요.”

“그럼요. 이제 당신도 기적술사고요.”

세영이 그렇게 씨익 웃는 걸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자신감에 넘치는 환한 미소였다. 아주 잘 어울렸다. 직전까지 그의 뇌리에 선명히 박힌 무표정한 모습 역시 무척 세련되고 절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웃는 모습이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규현은 품에 있던 상자를 세영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아들자 손목시계에서 삑삑대는 기계음이 울렸다.

직후 폭발음도 뒤따랐다. 남자가 두 사람이 있는 골목으로 돌아왔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코트를 입은 남자는 주머니 한 쪽에 손을 넣은 채 여유롭게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아주 손쉽게 공격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절박해 보이는 건 양쪽에서 밀고 들어오려 애쓰는 병사들이었다.

날아오는 총탄은 그대로 허공에 멈추더니 바닥에 낙엽처럼 떨어졌다. 로봇들은 아무 이유 없이 연기를 피워 올리더니 길 한복판에서 폭발했다.

빌딩 위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은 강제로 줄에 묶인 것처럼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 위에서 떨어진 병사들은 자유낙하했고, 그렇지 않은 병사들은 추락 직전 죽지 않을 정도로 속도가 줄었다.

어떤 것도 우연하게 일어난 게 아니었다. 모두 저 심드렁한 표정의 남자가 만들어낸 일이었다.

“더 이상 시간 없어, 발각됐다고. 이동해야 돼.”

“이 사람도 같이 움직일 거야, 세경 씨.”

세경과 규현의 눈이 마주쳤다.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규현이 보기에 그의 입가엔 미소가 역력해보였다.

“문제 될 건 없어. 차관으로 적절한 사람을 마침내 찾은 모양이지.”

차관? 새로운 전문용어인가? 규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저 여자는 내일부터 장관 대우받을 사람이거든. 잘 좀 도와줘요. 인터넷 고장나면 데스크탑 걷어찰 사람이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는 두 사람을 돌아봤지만 둘 중 아무도 추가적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공간 이동 포탈이 전개되는 그 순간까지도 질문거리로 꽉 차 있었다.